노란봉투법 촉구하는 양대노총. 연합뉴스노란봉투법(노조법 2·3조 개정안)이 지난 9일 야당 주도로 국회 본회를 통과했다. 여당 등에서 대통령 거부권 건의를 시사하는 가운데 노동계는 국회 통과까지 20년이 걸린만큼 노란봉투법을 지켜내겠단 입장이다.
노란봉투법은 파업 노동자 등의 과도한 손해배상 책임을 제한하고, 노사 관계에서 사용자와 쟁의행위의 범위를 재정비하는 것이 핵심이다. 노조 활동을 제한하는 과도한 손해배상·가압류를 막고, 사용자의 범주에 원청기업 등도 포함해 하청·특수고용노동자에 대한 원청의 책임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쌍용차 파업으로 촉발된 '노란봉투법'…"손배·가압류로 동료 죽음 겪어"
배달호 열사 추모식. 연합뉴스노란봉투법 논의는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3년 한국중공업(현 두산중공업)에서 스스로 몸에 불을 붙인 배달호 열사와 같은 해 한진중공업 고공크레인 위에서 극단적인 선택을 했던 김주익 열사가 사측이 제기한 거액의 손해배상소송과 재산 가압류로 인해 연이어 목숨을 잃으면서 '살인적인 노동탄압 수법'이 주목 받기 시작했다.
이어 2009년 쌍용차는 경영 정상화를 이유로 쌍용차 노동자들에게 대량 해고를 통보했다. 노동자들은 이에 반발해 77일간 파업으로 맞섰다. 그 결과 2014년 이들은 회사와 경찰에 47억 원을 배상하라는 법원 판결문을 받아 든다.
이 소식을 들은 한 시민이 성금 4만 7천 원을 과거 월급봉투를 연상케 하는 '노란 봉투'에 담아 보내 힘을 보탰고, 이를 계기로 '노란봉투법'이 등장했다. 관련 법은 2015년 발의됐지만, 19·20대 국회에서는 재계 반발에 밀려 폐기됐다.
이번 국회 들어서는 지난해 여름 대우조선해양이 하청 노동자들에게 470억 원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한 이후 다시 논란에 불이 붙었다. 하청 노동자들이 거제 옥포조선소를 점거하며 51일간의 파업을 벌이자 어김없이 거액의 손해배상소송이 제기된 것이다.
"가장 힘들었던 건 동료의 죽음이었다" 본격적인 노란봉투법 논의의 시작점이 됐던 쌍용차 파업 사태. 쌍용차 김득중 지부장은 해고자이자 동시에 국가 손배소의 당사자였던 동료들이 세상을 등지는 선택을 할 때마다 무너진 마음을 다시 추슬러야 했다.
그는 "손배를 당한 저와 동료들은 천문학적 금액이 언젠가 집행될 거란 정신적 압박을 받아왔었다"며 "가장으로서 경제 활동이 제약될 뿐 아니라 임금마저도 압류될까봐 노심초사였다"고 했다.
해고와 거액의 손배소, 더불어 쌍용차 파업을 바라보는 차가운 시선은 당사자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힘들게 했다고 전했다. 쌍용차에서는 손배·가압류로 인해 노동자와 그 가족 30명이 세상을 등졌다.
법이 개정된다고 동료들을 살릴 수도, 손배 당사자들이 소급 적용을 받을 수도 없었지만, 그는 더 이상의 고통을 막기 위해 노란봉투법 시행을 바랐다.
김 지부장은 "노사 교섭이 난항을 겪을 때 악용되고 남용되는 것이 손배 문제와 가압류"라며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노동조합 활동의 무력화뿐 아니라 노노(勞勞)갈등도 불러온다"고 강조했다.
이어 "재판에 대응하는 14년간 2009년도의 그 악몽 같은 진압 과정에 대한 트라우마를 자꾸 계속 떠올려야 했다"며 "지난해에도 동료 20여 명이 여전히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고 있다는 진단서를 받아들었다"고 했다.
싸워온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탓에 그는 지난 9일 노란봉투법 통과가 실감 나지 않았다고 했다. 김 지부장은 "국회 전광판에 뜬 노란봉투법 가결 사진을 동료들과 주고받았다"며 "기대한 만큼 실망도 컸던 시기가 있었지만, 결론적으로는 기쁘다"고 전했다.
'손배·가압류 남용'…"정당한 노조활동 무력화 할 목적"
스마트이미지 제공고용노동부가 지난해 실시한 노동조합·간부·조합원을 대상으로 제기된 손배·가압류 소송 실태조사에서 2009년부터 2022년 8월 사이 2752억 원 규모의 151건의 의 손배 소송이 제기됐고, 30건(246억 원)의 가압류가 신청됐다.
"노동 3권에 의해서 파업했을 뿐인데 손배 금액은 월급쟁이가 잡아볼 수도 없는 돈이었다"
2010년 비메모리 반도체회사 KEC 조합원들은 파업했다. 회사는 1년 동안 직장폐쇄로 맞섰고, 노조는 14일간 공장을 점거했다. 파업은 끝났지만, 회사는 손해배상으로 노조에 301억 원을 청구했다. 2016년 법원은 노조가 회사에 30억 원을 배상하라고 했다. 회사는 노조 간부 외에 일반 조합원에게도 소송을 제기했다.
실제 조합원들은 3년 동안 최저임금 150만 원만 받고 나머지 임금을 회사에 압류당하며 이 돈을 모두 갚았다.
금속노조 구미지부 KEC지회 이종희 전 지회장은 "손배·가압류가 전 조합원에 걸쳐서 무차별적으로 이게 진행됐고 최저 생계비 정도를 빼고는 모두 압류가 됐다"며 "당시 조합원들이 한창 아이를 키우고 있어 돈이 많이 들어갈 떄였다. 2~3명씩 키우는 조합원은 빚을 내기도 했고, 아직도 당시 냈던 빚을 갚는 등 끊임없이 고통 받고 있다"고 했다.
2011년 아산공장에 벌어진 파업으로 10년간 손배 소송이 이어진 유성기업. 노조의 쟁의행위에 대해 기업은 직장폐쇄를 단행했고 영업손실 등을 명목으로 40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2심에서 10억여원을 배상하라는 판결이 나왔지만, 회사 측의 노조 무력화 시도가 드러나 10년 만에 노사합의로 소송이 취하되며 종결됐다.
손배 당사자였던 유성기업 김성민 영동지회장은 "손배나 가압류가 인용되면 한 가정이 그냥 완전히 파괴된다"며 "손배·가압류가 사용자의 대항권이라고 하지만 손해를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것을 넘어 노동조합을 무력화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파업하면 손배 소송을 당한다는 신호를 줘 노조를 압박한다는 것이다.
그는 "파업 당시 기업 측은 손배·가압류를 카드로 내세웠다"며 "파업을 그만두고 현장으로 복귀하거나, 어용노조에 가입하면 주요 직책을 맡은 간부였음에도 손배 소송에서 빼주는 식"이었다고 설명했다.
尹 대통령 거부권 시사…노동계 "거부권 아닌 법안 공포해야"
연합뉴스법안이 통과되자 노동계는 환영 입장을 밝혔다. 민주노총은 "노동자 권리 보장과 거리가 멀었던 노조법이 제자리를 찾기까지 20년이 걸렸다"며 평가했고, 한국노총은 "쟁의행위를 한 노조와 조합원에게 무자비한 손배 가압류 폭탄으로 보복했던 악덕 관행도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노조법 2,3조 개정운동본부 김혜진 공동집행위원장은 "거액의 손배 때문에 재판이 진행되는 노동자, 가장 대표적으로 대우조선해양 470억 손배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한 전향적인 논의가 시작될 것"이라며 "택배 노조, 현대제철, 건강보험 고객센터 등 오랜 시간 싸우고 있는 노동자들의 문제가 풀릴 가능성이 높아질 것 같다"고 했다.
다만 "법안 통과 이후 고용노동부가 교섭이 손배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사업장 문제에 대해서 전향적인 논의를 시작하자고 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거꾸로 산업계 문제 등을 얘기하면서 거부권을 운운해 당황스럽다"고 덧붙였다.
실제 여당과 경제단체들은 노란봉투법으로 "경영 활동이 위축되고 노사갈등이 심화할 수 있다"며 대통령의 거부권 건의를 촉구하고 있다.
노동계는 20년 만에 개정된 노조법을 끝까지 지켜내겠다는 입장이다.
민변 이용우 노동위원회 위원장은 "권리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최소한의 권리 보장법인데 노동 약자를 얘기했던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에서 그리고 헌법과 법치를 얘기하는 윤석열 대통령의 입장에서 노란봉투법 거부권 행사는 매우 모순적"이라며 "신속한 법안 공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노조법2·3조개정운동본부와 양대노총은 13일 오전 용산 대통령실 앞에서 대통령 거부권 행사를 막기 위한 기자회견을 열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