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백마고지전적비를 올라가는 언덕. 이도훈 씨 제공
▶ 글 싣는 순서 |
①"와~저기가 북한이라구요?" ②천오백년 역사 품은 건봉사…분단 70년 상흔 곳곳에 ③금강산까지 32km…그러나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④'대국민 사기극' 평화의댐…평화·안보관광지로 변신 성공 ⑤철원에서 멈춘 금강산행 열차…언제 다시 달릴까? ⑥전쟁 참상 간직한 백마고지…한반도 평화는 언제 올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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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MZ 자유평화 대장정' 엿새째 날이 밝았다. 사실상 장거리를 걷는 마지막 날이다. "우리는 원정대! 가자가자 DMZ!" 이곳 구호가 익숙해질 때쯤 집으로 돌아간다.
오늘 일정은 철원 노동당사에서 도피안사를 거쳐 학저수지까지 걷는다. 총거리는 약 10km다.
백마고지서 숨지려는 조국을 살리었노라
18일 백마고지전적비 앞 역사관에 당시 국군 장병들의 전투 모습이 담긴 동판이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 대원들은 이날 오후 백마고지 전적비에 들러 이번 여정의 두 번째 참배를 올렸다. 태극기가 좌우로 길게 정렬된 언덕 너머로 하늘을 향해 높게 솟은 전적비가 보였다.
총 22.5m 높이의 백마고지전적비가 언덕 위에 서 있다. 당시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한 국군 제9사단의 넋을 기리기 위함이다. 박영규 인턴기자백마고지 전적비는 백마고지 전투에서 희생된 호국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1990년 조성됐으며, 높이는 22.5m에 달한다. 이 때 전적비의 높이 '22.5'의 각 자리의 숫자를 더하면 9가 되는데, 이는 백마고지 전투에 참여한 국군 9사단을 나타내기 위해 설계했다고 한다.
전적비 뒤로는 백마고지가 보였다. 군사시설이 있어 촬영이 제한돼 눈으로만 담아야 했지만,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한국전쟁 최대의 격전으로 꼽히는 '백마고지 전투'가 일어났던 곳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고요했다.
해발 395m의 백마고지는 군인들 사이에서는 395산이라고 통했다. 전쟁 전까지만 해도 무명의 야산이었지만, 전쟁 이후 한국전쟁의 참혹함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장소가 됐다.
영화 고지전의 한 장면영화 '고지전'의 주요 배경인 '애록(AERO-K)고지'의 실제 배경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백마고지 전투는 1952년 10월 6일부터 15일까지 백마고지를 쟁탈하기 위해 국군과 중공군이 벌인 혈전으로, 세계 역사에서 유래가 없을 만큼 치열한 포격전, 수류탄전, 백병전 등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어졌다.
당시 백마고지에 발사된 포탄의 숫자만 해도 국군 20여만발, 중공군 5만발 등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화력이 쏟아졌다. 백마고지의 유래 역시 이 기간 중 극심한 공중 폭격과 포격으로 민둥산이 된 고지가 마치 백마가 누워있는 것처럼 보여 명명됐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18일 백마고지 호국영령을 기리는 전적비 앞에 흰 말 동상이 서 있다. 백마고지는 폭격으로 민둥산이 된 고지가 마치 백마처럼 보인다고 하여 이름 붙여졌다. 이도훈 씨 제공AP통신 역시 1952년 10월 9일 자 기사를 통해 백마고지 전투를 '시산혈하'(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강을 이룬다)라고 표현하며 "한국군과 중공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전략고지 백마를 탈취하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전개했다"고 보도했다.
10일간의 치열한 공방전 끝에 국군 장병들은 고지를 재탈환하며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국군 3422명, 중공군 1만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많은 인명이 희생된 참혹한 전투로 역사에 남게 됐다.
대장정 대원들은 전적비 앞에서 묵념하며 둘째 날 '양구전투 위령비'에 이어 다시 한번 호국영령을 위로하고 한민족의 평화를 기원하는 시간을 가졌다.
전쟁의 참상을 되풀이 하지 않으려면 남과 북이 사이좋게 지내야 하지만 한 때 한반도 데땅트의 기운이 한반도를 지배하는가 싶더니 다시 긴장이 찾아오고 적대감이 고조되는 현실에 대한 답답함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도피안사' 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가다
18일 철원 도피안사에 보물 22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서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깨달음의 언덕으로 건너간다'는 뜻을 가진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때 철원군이 격전지가 되면서 절도 함께 완전 폐허가 됐다. 그러다가 1959년 당시 육군 제15보병사단에서 재건하여 군종 승려(군부대 내에 예속되어 있는 불교 승려)를 두어 관리하고 있다.
도피안사에는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과 보물 223호로 지정된 삼층석탑이 있다.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불상을 받치고 있는 대좌까지도 철로 만든 보기 드문 작품이다. 불상은 자비로운 미소를 띠고 있어 신라 말 철원 지역에서 성장한 지방 세력의 모습을 형상화했다고 전해진다.
18일 철원군 도피안사 법당 내부에 국보 제63호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불상이 위치한 법당 내부로 들어가자 향내음이 가득했고, 스님과 신도들이 무릎을 꿇고 앉아 법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향과 스님이 목탁을 치며 염불을 외는 소리가 합쳐져 경건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도피안사 법당 앞에는 삼층석탑이 세워져 있었는데,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었다. 도피안사는 한국전쟁 당시 격전지였지만 석탑의 상태는 상륜부와 3층 지붕돌 일부만 손상되었을 뿐 전체적으로 양호한 편이었다.
철원역사문화공원 반응 엇갈려…'추억여행' vs '어색'
18일 철원역사문화공원 내부에 철원역이 재현돼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앞서 대원들은 철원군의 노동당사 앞에 위치한 철원역사문화공원을 방문했다. 이곳에는 한국전쟁 이전 경제적으로 번성했던 철원읍 시가지가 재현돼 있었다.
1930년대만 해도 철원군은 인구 8만명 이상이 거주했던 강원도 3대 도시 중 하나로, 당시 철원읍 시가지에는 극장, 기차역 등 근대 시설도 많았다고 한다.
당시 철원역에는 서울과 원산을 잇는 경원선과 더불어 금강산 여행을 위한 전차가 운행됐다. 이에 금강산 관광을 위해 찾은 여행객들의 발길로 붐볐다고 전해지며, 이들이 묵을 수 있는 여관 등의 접객업소도 100여 곳에 이르렀다고 한다.
18일 철원역사문화공원 내부에 철원극장이 재현돼 있다. 류효림 인턴기자재현된 철원극장에는 우리나라 영화사 초창기의 전설적인 무성영화로 전해져 내려오는 나운규 감독의 '아리랑' 포스터가 걸려 있어 눈길을 끌었다. 철원극장은 과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화예술인들이 공연을 펼쳤던 강원도 문화예술의 산실이었다.
대원들의 철원역사문화공원에 대한 평가는 다소 엇갈렸다. 과거 철원의 번영했던 모습을 신기해하며 사진에 담는 대원도 많았지만, "과거의 모습이 현대의 모습으로 어색하게 재현돼있어 실망스러웠다"며 "빛 바랜 원형 그대로 보여줬으면 어땠을까"하는 반응도 나왔다.
18일 보수공사 중인 노동당사 앞에서 대원들이 기념 사진을 찍고 있다. 이도훈 씨 제공'분단의 상징'으로 불리는 북한 노동당사는 한국전쟁 때 훼손된 이후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붕괴 위험에 처해 올해 3월부터 보수공사 중인 관계로 관람할 수 없었다. 보수공사는 내년 11월 마무리될 예정이다.
원정 이레째인 19일에는 고려천도공원부터 강화평화전망대까지 걷고, 전망대에서 해단식을 진행한다. 총거리는 약 4km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