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씨가 A씨에게 8개월간 욕설과 고성을 들은 뒤 상담을 받기 위해 알아본 흔적. 정성욱 기자경기도에서 방문 요양호보사로 활동중인 홍미선(가명·65)씨는 8개월간 자신이 돌보던 80대 A씨의 간호를 더이상 하지 않기로 했다. A씨가 요양보호사의 업무가 아닌 일까지 무리하게 요구했기 때문이다.
A씨는 홍씨에게 매달 가정집 6~7곳이 먹을 만한 양의 김치를 담그게 했다. 집으로 주문한 배추나 알타리무를 한아름씩 손질하고 헹구게 했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A씨의 네 자녀에게 차례로 돌아갔다.
김치뿐만이 아니었다. A씨는 홍씨에게 쌀가루로 송편을 만들게 하거나, 자식들이 먹을 불고기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홍씨는 "어르신 몸이 불편하니 도운 건데, 알고 보니 자식들에게 줄 김치나 반찬을 만들게 한 거였다"며 "어느 순간부터는 당연한 일처럼 요구했다"고 말했다.
노인장기요양보험법에 따르면 요양보호사는 수급자가 씻는 걸 돕거나 식사 준비, 간단한 청소나 산책, 정서교감 등을 할 수 있다. A씨 사례처럼 '수급자의 가족만을 위한 행위'는 금지된다.
더욱이 A씨는 일을 하는 홍씨에게 고성을 지르거나 욕설을 하며 재촉했다고 한다. 이런 생활이 8개월간 이어지던 이달 초, 견디다 못한 홍씨가 "못하겠다"고 말하자 A씨는 "그럼 너 그만둬"라고 말했다.
홍씨는 그날로 일을 그만뒀고 한동안 불면증에 시달리며 심리상담을 받았다. 홍씨는 "요양보호사는 돈을 버는 직업이기도 하지만, 사명감과 봉사정신이 꼭 필요한 일"이라며 "그렇다 보니 이런 수급자를 만날 때는 실망감이 훨씬 크고 스트레스도 심하다"라고 했다.
요양보호사 돌려 막기? 재가센터 '묵살'도 빈번
방문 요양보호사인 홍미선(가명)씨는 수급자의 요구로 8개월간 매달 김치를 담갔다. 그렇게 담근 김치는 수급자의 네 자녀들에게 돌아갔다. 본인 제공A씨처럼 수급자가 요양보호사의 규정 외 업무를 시키는 문제는 매년 발생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인권침해(성희롱·폭언 등)를 당한 요양보호사의 '고충상담' 건수는 36건이다.
임금이나 실업문제 등이 포함된 전체 건수가 3473건임을 고려하면 적은 수치이지만, 피해를 입은 요양보호사가 모두 상담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드러나지 않은 피해는 더 많다는 게 종사자들의 의견이다.
문제는 이런 피해가 재가방문요양센터(재가센터)같은 장기요양기관 차원에서 묵살되는 문제가 많다는 것이다. '방문 요양보호사'들은 대부분 개인이 운영하는 재가센터와 계약을 맺고 일을 한다.
하지만 재가센터 입장에선 수급자가 곧 돈이다 보니, 갑질이나 횡포를 부리는 수급자를 끊어내기가 쉽지 않다. 때문에 수급자보다는 요양보호사를 교체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홍씨 역시 사건 직후 담당 재가센터에 A씨 문제를 알리자 센터는 "그 집은 매번 그런다"며 다른 요양보호사를 보냈다고 한다. 그마저도 이제 막 자격증을 취득한 신규 요양보호사이자 7번째 교체였다.
요양보호사 업무를 담당하는 건강보험공단 역시 피해사례가 확인될 경우, 담당 센터에 주의를 주고 기관평가를 낮게 매기는 정도가 최선이다. 건강보험공단 관계자는 "요양보호사가 수급자로부터 폭언이나 성희롱 등을 당하는 문제를 인지하고 있으며, 장기요양기관에 직접 제재를 가하지 못하는 어려움도 알고 있다"며 "다만 요양보호사들을 위한 고충상담창구를 운영하고 상담을 진행하고 있으며, 적절한 조치를 위해 관계기관에 연계지원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녹음 시작합니다" 피해 막나…전문가, '낙인찍기' 경계도
80대 수급자 혼자 지내는 집에서 홍씨가 다듬은 옥수수. 홍씨는 "이것들 모두 수급자의 자녀들에게 돌아갔다"고 밝혔다. 본인 제공
요양보호사가 수급자로부터 피해를 입는 문제가 반복되자 보건복지부는 올해 8월부터 '신분증형 녹음기' 보급 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명찰이나 목걸이 형태로 된 녹음기를 착용하고 방문 요양활동을 하는 것이다. 수급자가 성희롱이나 폭언을 할 경우, 고지 후 녹음기를 작동한다.
현장에선 요양보호사가 녹음기를 착용하는 것만으로도 가해를 하던 수급자가 자제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현재 전국에 250여개가 보급돼 시범운영중이다.
다만 전문가들은 요양보호사와 수급자간 문제를 단편적으로 봐선 안 된다고 진단했다. 사례만으로 판단할 경우 '낙인찍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연성대학교 사회복지과 구재관 교수는 "요양보호 문제를 한 쪽만의 문제로 보고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낙인찍기가 될 수도 있다"며 "수급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가족들에게도 이같은 사실을 알리고 수급자에게는 예방교육을, 요양보호사에게도 대응 매뉴얼을 숙지시켜 함께 바꿔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한림대학교 사회복지학부 석재은 교수는 "요양보호사도 피해를 입지만 반대로 수급자가 학대를 당하는 문제도 있어서 어느 한쪽의 문제로만 판단해선 안 된다"며 "문제가 발생하면 관련 기관에 알려 개선해 나가야 하며, 관계부처 역시 제도 개선에 힘써야 한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