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계에서 시나리오를 가로채 '저작자' 등록을 마친 제작자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물의를 빚고 있다. '검정고무신' 고(故) 이우영 작가 사건으로 저작자 문제가 화두로 떠오른 만큼, 문화계 전반에 걸친 해당 부조리 행태를 둘러싼 논란이 가열될 것으로 보인다.
9일 한국시나리오작가조합(이하 조합)에 따르면 김기용 작가는 지난 2018년 한 공모전에 단독 집필한 26쪽짜리 장편영화용 트리트먼트(시나리오 집필 전 단계 저작물)를 '해인'이라는 제목으로 제출했다. 당시 공모전 예심 심사위원이던 한 영화사 대표 ㄱ씨는 해당 트리트먼트를 보고 김 작가와 접촉했다.
그해 7월 19일 김 작가와 ㄱ씨는 작가계약서를 체결했다. 김 작가는 '해인' 트리트먼트에서 몇 가지 설정을 바꿔 4개월 뒤 '심해'라는 제목의 시나리오 초고를 완성했다. 그런데 그 직후 ㄱ씨는 김 작가에게 "글재주가 없는 것 같으니 영화 말고 다른 업을 찾아보라"는 취지의 말과 함께 계약을 중도 해지했다.
조합 측은 "문제는 제작자 위치에 있던 ㄱ씨가 김 작가 시나리오를 받아서 그 위에 직접 윤색을 가한 ㄱ씨 버전의 '심해' 시나리오를 만들어 두었다는 점"이라며 "김 작가와 계약해지 보름 뒤 ㄱ씨는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자신을 '단독 저작자'로 해 해당 버전 '심해' 시나리오를 등록했다"고 전했다.
이어 "ㄱ씨 버전 '심해'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김 작가가 단독으로 집필했던 '해인' 트리트먼트에서 몇 가지 설정을 바꿔 완성한 것이므로 ㄱ씨가 '심해' 시나리오 단독 저작자가 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강조했다.
'저작자'는 저작권자와 다른 개념이다. 저작권자는 '저작재산권을 보유한 자'를 말하지만, 저작자는 저작재산권 보유 여부와 무관하게 저작물을 '직접 창작한 자'를 가리킨다.
앞서 지난 8월 14일 한국저작권위원회는 '검정고무신' 캐릭터를 창조한 고 이우영 작가와 나란히 캐릭터 공동저작자로 이름을 올렸던 세 사람에 대해 저작자 등록 직권말소 처분을 내렸다. '검정고무신' 캐릭터는 이 작가가 단독으로 창작한 것인데, 수익 지분 확보를 위해 후속으로 참여한 두 작가와 제작자가 공동 저작자로 이름 올린 것을 부정행위라고 못박은 것이다.
조합 측은 "('검정고무신' 사례에서 봤던) 제작자의 선을 넘는 탐욕은 형태를 바꿔 진화하고 있다"며 "바로 '심해'의 경우가 그렇다"고 비판했다.
"문해력 일정 수준 이상이면 어느 누가 읽어도…"
결국 김 작가는 조합 측에 자신의 '심해' 시나리오와 ㄱ씨 버전 시나리오를 상호 비교해 ㄱ씨의 창작 기여도를 평가해달라고 의뢰했다.
이에 조합은 각본 크레디트를 2개 이상 보유한 판정위원 3명을 선발했다. 그리고 사안의 배경에 대한 일체 정보를 전달하지 않은 채, 어떤 것이 누구의 버전인지 알 수 없도록 'A작가'(김 작가), 'B작가'(ㄱ씨)로만 표기한 시나리오 2개를 전달했다. 이는 일말의 편견이나 선입견마저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판정위원들끼리 사전 논의를 통해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지 못하도록 자신 외에 누가 판정위원인지도 알려주지 않았다.
판정위원 3명이 각각 내린 판단은 결과적으로 만장일치를 이뤘다. 김 작가가 95%를 창작했고 ㄱ씨의 창작 기여도는 5%에 머문다는 것이었다.
해당 판정 절차를 관장한 조합 김병인 대표는 "문해력이 일정 수준 이상 된다면 어느 누가 읽어도 동일한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사안"이라고 전했다.
특히 김 대표는 "두 시나리오를 모두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김 작가가 재능 있는 작가임을 인정한다. 오히려 ㄱ씨의 윤색이 시나리오 질을 떨어뜨렸다는 것이 중론"이라며 "ㄱ씨가 김 작가에게 '당신은 재능이 없다' '이 일에 적합하지 않다'고 했다는데, 이러한 언행은 인재가 귀중한 산업에서 업계 전체를 망치는 일"이라고 질타했다.
조합 측 역시 "ㄱ씨는 공동 저작자 지위도 주장해서는 안 된다"며 "ㄱ씨는 '검정고무신' 캐릭터의 공동 저작자로 이름을 올렸다가 직권 말소된 두 명의 후속 작가와 한 명의 제작자를 합쳐놓은 셈"이라고 꼬집었다.
김 작가는 ㄱ씨를 형사고소했다. 서울 종로경찰서가 관련 수사에 착수했는데, 경찰은 해당 건에 대해 무혐의 의견으로 검찰에 송치했다.
조합 측은 "경찰이 무혐의 의견을 낸 사유를 보면 '저작자'와 '저작권자' 개념조차 혼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며 "조합 판정문을 제출받았음에도 두 시나리오 사이 캐릭터, 극 전개 방식에 상당한 차이가 존재한다는 ㄱ씨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주장했다.
이어 "경찰로서는 시나리오 캐릭터와 사건 구조를 객관적으로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더라도, 애초에 '심해' 시나리오는 김 작가가 단독으로 집필했던 '해인' 트리트먼트를 발전시킨 결과물이라는 것은 경찰도 알고 있었다"며 "그런데 어째서 ㄱ씨가 '심해' 시나리오의 단독 저작자라는 주장을 의심하지 않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고 의구심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조합은 한국시나리오작가협회와 공동으로 종로경찰서에 항의서를 전달했다. 검찰로 송치된 해당 사건은 ㄱ씨가 한국저작권위원회에 저작자로 등록한 지 5년이 되는, 오는 27일이 공소시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