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고 그룹 사무실에서 싱어송라이터 크래커를 만났다. 이고 그룹 제공'밤과 새벽 사이에 만들어진 노래라 그런지 삐죽 튀어나온 가사들이 많았습니다. 허나 다치지 않게 다듬어 놨으니 쉬이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싱어송라이터 크래커(CRACKER)가 5개월 만에 새 미니앨범 '밤과 새벽 사이'로 돌아왔다. 지난 1일 발매된 이 앨범 소개 글 첫머리에는 위와 같은 내용이 담겼다. 주로 싱글을 내며 활동해 온 그에게 이번 미니앨범은 2019년 나온 '도서관' 이후 무려 5년 만이다. CBS노컷뉴스는 조금은 숙제처럼 남아있던 '앨범 단위의 신곡'을 마침내 들고 나온 크래커를 지난달 30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이고 그룹(EGO GROUP) 사무실에서 만났다.
오랜만에 내는 미니앨범이라서 더 준비를 많이 했다는 크래커. 본격적인 작업 기간을 묻자, 6~8개월 정도라는 답이 돌아왔다. 5년 2개월 만에 새 EP를 냈으니, 조금은 부담감을 내려놨을까. 그러자 크래커는 "(그동안) 싱글을 계속 내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아, 뭔가를 하고 있구나'를 보여줬지만, (EP를 냈다고 해도) 사실 떨쳤다고는 못 하겠다"라고 답했다.
이어 "검정치마님이 한 '아티스트는 퇴근 없는 삶을 산다'는 말에 공감한다. 저도 그렇게 사는 것 같다. 후련하긴 해도 결코 '아, 마쳤다!' 느낌은 아니고 '또 해야지' '다음 앨범 준비해야지' 이런 마음"이라고 털어놨다.
앨범명에서 알 수 있듯, 크래커는 '밤과 새벽 사이'에 곡을 작업했다. 스스로 '야행성'이라 밝힌 그는 평소에도 늦게 자는데 음악 작업에 들어갔을 때는 '규칙적으로' 더 늦게 잔다고 밝혔다. 새벽에 동이 트는 장면도 자주 볼 만큼.
지난 1일 발매한 크래커의 새 미니앨범 '밤과 새벽 사이'. 이고 그룹 제공크래커는 "밤과 새벽 사이에 써서 그런지 몰라도 (곡이) 어둠에 관해 한 획을 이루긴 한다"라며 "들으시는 분들이 어둠과 밤, 새벽이란 존재가 이렇게 해석됐구나 하고 들으시는 재미가 있다. 예를 들어 똑같이 '밤'이란 단어를 써도 노래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다르다"라고 전했다.
총 4곡이 실린 이번 앨범의 타이틀곡은 '미안하다고 말하면 없던 일이 되나요?'다. 풍성한 현악기와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복고적인 신스 사운드가 특징인 이 곡은 그동안 선우정아·규현 등의 곡에 참여한 권영찬이 편곡을 맡았다. 사랑의 종결을 '물거품 한 아름' '나의 새벽에 시를 쓰고 갔네요' 등의 시적인 문장으로 표현한 가사도 인상적이다.
'미안하다고 말하면 없던 일이 되나요?'는 친구와 대화하다가 우연히 소재를 발견한 노래다. 크래커는 "친구 커플이 서로 다투어도 미안하다고 하면 풀린다고 하더라. 넘어갈 수 있다고. 근데 저는 속으로 어떻게 '미안하다'고 해서 바로 끝이 나지? 싶은 거다. 인간관계가 그렇지 않나. 거기서 시작해서, 꼭 사랑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도 충분히 여러 관계에서 느낄 만한 감정으로 다뤘다"라고 말했다.
작사·작곡은 물론 편곡까지 직접 해냈던 크래커는 이번 타이틀곡을 '전문가'인 권영찬에게 맡겼다. 의뢰하고 싶은 편곡자 목록을 정리했다. 기존에 '현 편곡'을 맡겨본 인연이 있던 권영찬은 '전체 편곡'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편곡을 거친 후 어떤 점이 달라졌을까. 크래커는 "현악기가 들어가다 보니까 웅장해졌고 몰아치는 드라마가 생겼다. 기승전결을 만들어주셨다고 할까. 항상 갈증이었던 게 기승전결이었다. 저는 그런 전개를 잘 못 하는 것 같아서, (이번 작업이) 시너지가 좋았던 것 같다"라고 바라봤다.
크래커가 미니앨범을 내는 것은 5년여 만이다. 이고 그룹 제공'나의 기쁨을 가져간 당신에게'는 80년대 포크 송이 떠오르는 회상적 분위기의 곡이다. 서브 타이틀로 삼은 이유를 묻자, 크래커는 "사실 두 곡 모두 제 마음속으로는 메인이냐 서브냐 고를 수 없을 정도로 애착이 간다. 이 곡은 조금 더 시적으로 표현하고 싶었다. 원래 제가 하던 스타일의 '은유적인 스타일' 연장선에 두고 싶고, 좀 더 밴드적으로 풀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두 번째 트랙인 '김정숙 찾기'에서 가장 궁금한 점은 '김정숙'이란 들어간 연유였다. '김정숙'이란 이름은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한 '가장 흔한 이름' 중 하나여서 골랐다. 크래커 또래로 따지면 '지혜'가 가장 흔한 여자 이름이었지만, 요즘 인기 있는 연애 예능에서 '영숙' '정숙' 등 예스러운 별칭을 쓰는 것도 두루 고려해 나름 '전략적으로' 정했다고 부연했다.
크래커는 "지금은 못 만나는 친구, 연인, 선생님이 있지 않나. 너무 재미있게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연락조차 하지 않는 사람들, 누구든 있지 않을까.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한 명은 있는 것 같다고 하더라. 아, 사람들도 마음에 그런 사람을 한 명쯤은 품고 사는구나 싶었다. 이걸 사랑 노래로 풀면 쉽게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트랙 '별종'은 크래커가 이전에 해 온 음악과 가장 가까운 스타일이다. 산뜻하고 발랄한 신스 멜로디가 돋보이는 미디엄 템포 곡이다. 가사로는 별이 아닌 별종이 되어도 괜찮다고 말한다. 크래커는 "자전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고 싶어서 만든 음악"이라며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조금 의외긴 했다"라고 멋쩍게 웃었다.
크래커는 "'빛을 잃어도 괜찮지 나'라는 가사가 있다. 그래도 네가 나를 아니까. 어쩌면 대단한 가수라는 영광을 누리지 못하는 패배자랄까, 그런 평범한 사람이 되어도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는 그것 하나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돈을 많이 벌고 엄청난 위치에 있는 게 아니어도,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진지한 얘기인데 진지하게만 하고 싶지 않아서 밝음을 묻혀 중화했다"라고 소개했다.
크래커는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단독 콘서트를 열어 관객을 만났다. 이고 그룹 제공5년 만에 내놓은 이번 '밤과 새벽 사이'는 크래커의 여러 '변화'가 담긴 앨범이기도 하다. 크래커는 "이전에는 피처링을 많이 썼다. 그래서 노래에 (저 아닌) 여성분들, 남성분들 목소리가 많다. 둘째는 원래 제가 편곡을 다 했다면 이번엔 다른 아티스트와 협업해서 완전 새로운 느낌으로 나왔다고 생각한다. 일러스트로 된 앨범 표지가 제 정체성이기도 했고 이걸 좋아해 주신 분도 많았는데, 이번엔 제 사진으로 넣어봤다"라고 말했다.
음악 스타일의 변화도 언급했다. 크래커는 "약간 '징징징' 하는 기타 디스토션(거친 느낌의 소리) 사운드가 조금 더 메인이 된 음악을 하게 됐다. 그래서 장르라고 하면 '얼터너티브 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 전 노래들은 이런 사운드를 거의 안 쓰다시피 했다"라고 말했다.
요즘 들어 밴드 음악을 더 좋아하게 됐는지 물으니, 크래커는 "내가 안 한 게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기계 음악도 했고 발라드 같은 음악도 해 봤는데 록적인 성향의 음악을 안 해 봤더라. 새로운 시도와 변화를 해 보고 싶었다"라고 답했다.
원래 밴드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다. 학창 시절 밴드부를 한 경험이 있다. 오락실 드럼 정도만 칠 줄 아는 상태로 오디션을 봤다가 떨어졌다. 포기하지 않고 보컬에 도전했다. 크래커는 "그때 버즈(BUZZ) 노래를 불렀다. 선배들은 드러머 떨어지고 바로 보컬 시험 보겠다고 하니 기가 찬 것 같았다. 그래도 '물건이다' 해 주셨고 밴드부 활동을 했다. 그때부터 밴드 음악 사랑하게 되고 윤도현, 버즈부터 외국 음악까지 들었다"라고 전했다.
가수라는 꿈을 꾸게 된 시발점도 결국 밴드였다. "축제도 많이 갔다. 환호성의 맛을 봐 버렸다. 완전히 그 도파민의 맛을 보고, '가수로서의 삶도 좋겠구나' 생각했다"라고 운을 뗀 그는 "원래 보컬로 시작했는데 대학 진학 때 실용음악과 다 떨어졌다. 군대 갔다 와서는 보컬로는 재능이 없다고 생각해 그때부터 편곡 공부를 시작했다"라고 밝혔다.
이번 미니앨범 타이틀곡은 '미안하다고 말하면 없던 일이 되나요?'다. 이고 그룹 제공편곡은 약 7년 전쯤 유튜브를 통해 배웠다. "말하면 말할수록 점점 민망해진다"라며 쑥스러워한 크래커는 "디피알 크림(DPR CREAM) 선배님한테 커피 사 들고 가서 '옆에 있어도 돼요?' 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보컬 입시 준비할 때 빼고는 학원에 다닌 적이 없다. 알음알음 배워서 첫 앨범을 냈다"라고 전했다.
맨 처음에는 '크라임 비츠'(crime beats)라는 이름을 썼다. 크래커는 "그때는 야망이 그득그득했다. 지구상에서 들을 수 없는 음악을 하겠다는 각오가 있었다. 그땐 칸예 웨스트(Kanye West) 등 힙합 음악에 '절여져' 있었다. 왜 바꾸게 됐냐면 누군가에게 (이름을) 설명할 때 '비츠'인지 '비트'인지 많이 물어서였다"라고 말했다.
이어 "뭔가 잘못됐다고 느끼는 와중에 눈앞에 크래커가 있었다. 그래서 그냥 '크래커로 하면 어떠냐' 했더니 다들 별로라고 했다. 저는 소신 있게 갔다. 비웃음을 살지언정 '기억에 남을 것'이라는 신념이 있었다. 남들이 좋든 싫든 내가 좋으면 된 거 아닌가 했다"라고 덧붙였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이 있긴 했지만, 그걸 제하더라도 크래커는 오프라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에야 처음으로 단독 공연을 열었다. 첫 단독 공연의 목표는 '원곡 그대로 들려주기'였다. 크래커는 "저는 신스 음악이 많아서 공연에서 (제대로) 표현하기가 힘든데, 그걸 어떻게 해소할까 고민이 많아서 오래 걸린 것도 있다. 기타, 드럼 소리를 어떻게 낼지 등을 디테일하게 수정해 공연에 적합하게 만들려고 했다"라고 설명했다.
관객과 직접 만나는 첫 단독 공연이어서 처음에는 너무 겁났다고 고백한 크래커. '무대에서 노래 망치면 어떡하지?' '관객들이 나를 안 좋게 보면 어떡하지?' 하는 걱정도 했다. 하지만 공연을 마친 후 만족도는 '70%'였다. 크래커는 "무대 위에서 관객 표정을 보니, 마치 '내 아들이 첫 학예회를 하는 것 같다' 하는 눈으로 보시는 분들이 많아서 응원을 받았다. 다음 공연을 해도 와서 좋아해 주시겠구나 하는 자신감이 약간 생긴 상태"라고 밝혔다.
올해 활동 계획은 어떨까. 크래커는 "이번 앨범을 기점으로 올해는 공연을 두 번 정도 할 계획이다. 그 공연에 맞춰 EP까진 아니어도 신곡을 준비할 예정이다. 작년 공연을 기점으로 오프라인 활동도 늘리고 뭐든지 '소통'을 늘리려고 한다"라고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