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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수'의 기능을 살려 세대를 연결하자!

    편집자 주

    분기별 합계출산율이 0.6명대까지 떨어진 대한민국의 인구위기. 아이들과 함께 우리의 미래까지 사라지는 현실을 마주하며 그 해법을 찾는 데 온 사회가 골몰하고 있습니다. 저출산 인구위기를 극복하려 'Happy Birth K' 캠페인을 펼쳐온 CBS는 [미래를 품은 목소리] 연재 칼럼을 통해, 지속 가능한 대한민국을 위한 다양한 의견들을 전합니다.

    [미래를 품은 목소리⑱]
    정신분석가 이수련
    한국라깡임상정신분석협회 대표
    한스아동청소년상담센터 원장

    정신분석가 이수련정신분석가 이수련
    한국의 저출산 문제는 위급상황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심각하다는 보고가 쏟아지고 있다. 이에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다양한 원인분석과 해결책을 제시하고 정부와 지자체를 비롯한 여러 기관들 역시 대책을 모색하여 실행하는 중이다. 대부분 적합한 분석과 해결책들이다. 예를 들면 사회는 청년의 경제적인 자립을 적극 지원해야 하고, 여성에게 편향되어 있는 양육 책임을 분산시키고, 엄마들이 직장을 잃지 않도록 방편을 마련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대책과 방안들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무엇보다 우선 청년들이 아이를 낳기를 원해야 한다.  
     

    "아이를 왜 낳아야 하죠?"라는 질문

    전통 사회에서 여자의 지위와 역할은 아이를 낳는 것으로 유지될 수 있었고, 성인 남녀가 혼인하여 아이를 낳고 가문을 잇는 것은 당연한 도리로 여겨졌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다르다. 이제는 각 개인의 선택과 결정이 존중된다. 청년들은 부모가 되기를 바랄 수도 있지만, 바라지 않을 자유도 있다. 아이를 낳으려면 그것이 사회적으로 중요하다는 사실만으로는 부족하고 본인이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기며 바라야 한다. 정신분석 상담가로서 청년들과 청소년들을 만나면서 자주 마주한 질문이 있다. "아이를 왜 낳아야 하죠?" 본인은 아이를 낳을 이유가 없는데 왜 낳으라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뜻이다. 이처럼 애초에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청년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는 추세다. 인간관계가 두렵고 힘들어서 친구나 연인을 만들지 못하거나, 사람 만나는 게 번거롭고 불편해서 인터넷으로만 소통하거나, 게임과 유투브가 하루의 일과인 경우는 청소년 상담에서 흔히 볼 수 있다. 프랑스의 정신분석가 마리-장 소레(Marie-Jean Sauret)는 [아동에 대한 정치적 논쟁]에서, 타인과 지식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증상을 해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점점 더 의존적이 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아이들을 보면 이제는 일본사회의 히키코모리같은 은둔자가 아이들의 표본이 될 만하다고 하면서 "자녀의 위치를 포기하지 않으면 부모가 되기 어렵다. 그런데 임상사례들은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사람들은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지."라고 진술한다.
     

    부성기능의 실추

    우리가 고심하며 들여다보아야 할 것은 마지막 문구다. 바로 "우리가 여전히 아이들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 다른 동물들에 비해 확연히 무능력하게 태어나는 인간존재는 언어와 법을 이용하여 인간사회라는 특별한 구조를 만들고 그 안에서 살아가게 되었다. 따라서 아이들은 인간사회의 양식을 받아들여야 하는데 마리-장 소레는 이를 위해 두 가지가 외부에서 실행되어야 한다고 전한다. 첫째는 아이를 반기며 필요한 것들을 내어주는 '환대', 둘째는 기존 세대의 삶의 양식과 가치를 물려주는 '전수'. 전자는 모성 기능, 후자는 부성의 기능으로서 지금껏 부모가 맡아왔던 것으로 아이에게 사회적 삶을 위한 준비를 갖춰주는 것이다. 아이를 사랑하는 구체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소비시장과 과학기술이 극도로 발달하며 삶을 지배하게 된 현대 사회에서 부성 기능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현대인은 앞세대의 문화와 양식을 전수받고 그 지혜를 활용하는데 공을 들이기보다 매번 향상된 품질로 갱신되는 고기술 상품의 세계를 삶의 터전으로 선택한 듯 보인다. 그 안에서 우리는 한계 없는 만족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떠밀린다. 함께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삶과 공동체에 제한을 설정하는 법과 규칙보다 효율과 이익을 최고로 삼는 무제한의 경제원칙이 우선시되는 것이다. 어른들은 이미 삶의 의미와 가치를 후세대에 전수하는 것에 관심이 없을 뿐더러 "너의 소중한 삶을 잘 살아봐!"라며 아이들이 애써 찾아낸 방식을 지지하지도 않는다. 폴란드의 철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ygmunt Bauman)은 [소비사회와 교육을 말하다]에서 청년들은 소비자 수요에 기여하는 한에서만, 어른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헨리 A. 지루(Henry A. Giroux)의 글을 인용한다. "문화는 인터넷, 다양한 소셜 네트워크, 휴대전화와 같은 새로운 미디어 기술을 이용해 아이들 삶의 모든 측면을 상업화하는 교육적인 힘을 지닌다. 이런 힘을 통해 청소년들을 과거에 목격한 그 어느 방식보다 직접적이고 광범위하게 대량 소비의 세계에 젖어들게 하는 것이다."
    이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여 밀고 나갈 힘이 있는 어른들, 예를 들면 정치권력을 운용하거나 거대 기업을 이끌며 소비시장을 쥐고 있는 이들은 이 메시지가 품은 함의를 더욱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그들이 아이들에게 아무것도 전수하지 않고 성장의 길을 막아버리는 사회, 스스로의 삶을 구축하기를 기다려주는 대신 배제하는 사회를 만드는 데 앞장선다면 청년들은 부모를 떠나 사회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또한 이를 방관하는 어른들 역시 현상황을 직시하며 변화모색을 궁리할 필요가 있다. 물론 후세대에게 삶의 발판을 만들어주는 데 힘을 쏟기에는 감당해야 할 삶이 힘겹고, 잃을 것들에 대한 걱정으로 선뜻 용기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긴 하다.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것

    그런 어른들에게 청년들은 다시 묻는다. 산다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거냐고. 자기는 살아야 할 마땅한 이유를 찾지 못해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느라 힘이 든다고. 아동청소년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인생에서 가장 희망차 있어 할 시기에 불안장애, ADHD, 우울증, 무기력 등의 이름표를 부여 받은 우리시대 수많은 젊은이들은 과연 어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일까? 어른들은 "삶은 이래서 살만 한 것이다"라는 증언을 들려주고 있는 것일까? 사실 청년들의 고통은 어떻게 친구를 사귈 수 있는지,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지, 어떻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을 수 있는지, 어른이 되면 무엇을 알고 배워야 하는지, 지켜야 할 소중한 것들은 무엇인지, 고통을 겪는다면 어떻게 이겨낼 수 있는지를 알고 싶지만 답을 구할 수 없어 허둥대거나 낙담하거나 두려움에 휩싸여 있을 뿐이다. 이 질문에 마주한 어른들은 뭐라고 답해야 할까? 과학이나 철학, 저명한 위인을 참조해야 할까? 하지만 질문은 '인간 삶'이 아니라 '내 삶'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답은 그렇게 찾을 수 없다. 그걸 왜 어른들에게 묻는 것일까? 이것이 바로 '전수'가 필요한 이유인데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에게 의미는 타인을 경유해서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청년들의 질문은 "내 삶은 어떤 의미가 있나?"에 머물지 않고 "내 삶이 당신에겐 어떤 의미가 있죠?"로 돌아간다. 전수의 다른 이름은 '인정'이기도 하다. 후세대는 전세대에게 질문하며 바란다. "내 삶이 당신에게도 소중한가요? 내 삶을 인정해주세요." 전수는 그런 인정의 증표다. "우리에게 네가 소중하니 이것을 밑천으로 삶을 일궈 봐! 우리가 응원할께"
     

    전수받은 자에서 전수하는 자로

    청년들이 '전수'의 관계로 전세대와 이어질 수 있다면, 그래서 그것을 밑천으로 삶을 각자의 방식대로 일궈 나갈 길이 열린다면, 청년들은 천천히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체험한 것, 알게 된 것, 이룬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며 지키려고 할 것이다. 부모를 비롯해 나를 지지했던 어른들이 그랬듯이. 자식, 제자, 후배가 소중해지는 건 바로 이때다. 내가 받았던 것을 나도 주고 싶은 마음, 내가 만든 것이 사라지지 않고 사랑하는 존재에게 남기를 바라는 마음,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살아갔던 것처럼 후세대도 그렇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마음이 생기는 때.
    '전수'의 기능은 회복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지금 여기에 맞는 전수를 발견하고 발명해야 한다. 냉혹한 현실에 지쳐 이를 잠시 잊은 어른들이 있다면 다시 그 역할을 이어가주길 바란다. 그리고 사회의 방향을 조정하는 힘있는 어른들에게 '전수'의 기능을 죽이지 말고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라고 강력하게 요구하길 바란다. 작은 외침들이라도 지속되다 보면 변화를 이루는 큰 목소리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고. 지그문트 바우만은 이를 '문화 혁명'이라고 부르며 '거대한 떡갈나무도 아주 작은 도토리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잊지 말자고 당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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