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훈 대표(오른쪽)과 아버지 김종기 씨. 소민정 프로듀서 전주한옥마을로부터 걸어서 10분 정도 떨어진 길목에는 동네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이색 카페 '기린토월'이 있다. '기린토월'은 본래 전주 사람들이 예부터 손꼽았던 8경 하나로, 전주의 주산인 기린봉의 형세가 기린이 달을 토해내는 모습과 같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5년 전 문화기획자 김지훈 대표는 40년 가까이 운영되다 폐업 상태에 있던 목욕탕 '호수옥'을 사들여 카페 기린토월을 만들었다. 호수옥이 동네 사람들의 속살을 드러내는 공간이었다면, 기린토월은 옥빛 대중탕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지역의 문화예술 작품으로 전주의 속살을 드러내는 곳이었다. 2층 계단에 다다르는 공간 한켠에는 하늘이 뻥 보이는 '한 뼘 미술관'이 있고, 1층은 지역 활동가들과 동네 주민들을 불러 모으는 플랫폼으로 활용됐다.
그랬던 기린토월이 지난 여름부터 메뉴에 콩국수를 올리기 시작했다. 아아와 디저트를 두던 테이블에는 이제 얼음 동동 띄운 푸르스름한 콩국수와 빨간 김치가 세팅된다. 커피를 내리던 매대는 콩국수를 만드는 조리대가 됐고, 커피콩을 갈던 그라인더 옆에는 서리태콩을 가는 믹서기가 추가됐다. 손님을 맞던 주인장 자리에는 일흔이 다 돼 가는 그의 아버지가 방금 삶은 국수를 한 줌 잡아 빨래 빨듯 찬물에 막 헹궈대고 있었다.김지훈 대표 아버지 김종기 씨. 소민정 프로듀서 Q. 카페에서 웬 콩국수예요?
아빠가 일자리도 없고 일거리도 없고 친구도 없고 아들이 있는 데는 바쁘고 하니까 계속 심심해 하시는 것 같아서 어떻게 하면 좋아하는 일을 만들어 줄 수 있을까 생각했어요. 어디 가서 그냥 단순노동 하는 일들은 이제 그만했으면 좋겠고, 저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동네 어르신들의 자존감을 높여주는 프로젝트를 하고 있는데 정작 저희 아버지는 그렇게 못하고 있었잖아요.
아버지가 우연히 전주에 처음 오시고 난 다음에 내주신 음식이 콩물이었거든요. 그걸 딱 먹자마자 어렸을 때 아버지 손잡고 여수 새벽시장에서 먹었던 콩물 생각이 나더라고요.
아버지는 본래 전남 여수에서 뱃일을 하시던 분이었다. 새벽녘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세상 모르게 자고 있는 어린 아들을 기어코 깨워 시장에 데려다가 콩물을 사멕이는 그런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거친 분이었지만, 아버지가 사주는 콩물만은 더할 나위 없이 진하고 부드러웠다. 시간이 지나 아버지는 전남 여수에서 전북 군산으로 일터를 옮기셨다. 여수에선 원양어선을 탔지만 군산에선 3개월에 한 번씩 섬에 나가 조업을 하셨다. 무엇이 그토록 고되고 힘들었는지, 아버지는 술을 자주 드셨다. 당신 가슴에 꽉 막힌 무언가를 소주로 쓸려 보내는 것 같았다.
배 타고 오시면 받은 돈으로 다 술 먹고 그랬거든요. 이젠 아버지를 포기하고 살아야겠다 싶었는데 작년인가 아버지가 일하시다가 손가락을 좀 다치셨어요. 손가락 끝이 살짝 절단될 정도인데 어업 일을 하시다가 그랬어요.
아버지가 이제 배 그만 타고 싶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런데 사실 모아놓은 돈이 한 푼도 없었어요. 한 푼도 없는데 그걸 이제 제가 다 감당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럼 뭘 해야 하는데 할 건 없고 남들 하는 일이나 해야 될 것 같은데 남들 하는 일도 없고… 사실 그것 때문에 한참 고민했어요.
막막했다. 술 때문에 갈등이 잦았던 아버지가 생업까지 그만 두신다 하니, 아이가 있는 집의 가장으로서, 또 아버지의 아들로서, 무엇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난감했다. 그렇게 한참을 고민하다 평소 아버지가 자주 내주신 콩물을 직접 만들어 팔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원양어선을 타고 갔다 오시면 항상 저를 깨워서 새벽 시장 가서 전어도 구워 먹고 팥죽도 먹고 콩물도 먹었어요. 사실 여수를 떠나고 나서는 그걸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어요. 여기 딱 자리 잡고 난 다음에는 콩물을 만들어서 우뭇가사리에 설탕을 타서 주는데 너무 맛있는 거예요. 순간 그때 기억이 막 났어요. 그때 너무 좋았는데 아버지도 질리지도 않고 매일 그렇게 콩물을 사서 드시고 하니까 음- 그럼 아빠가 좋아하는 콩물을 한번 팔아볼까 해서 처음 검정 두유를 만들었어요.
그동안 아버지랑 사이가 많이 좋았거든요. 알코올을 너무 많이 드시고 하니까 사이가 안 좋다가 이젠 아빠랑 사이좋게 지내보자 해서 두유를 팔았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잘 안 팔리더라고요. 그러다 여름이 돼서 올해는 콩국수를 만들어보자 했던 거예요. 이건 좀 팔리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했더니, 정말 팔리더라고요.
아버지가 만든 콩국수. 소민정 프로듀서 처음에는 주업종에 맞게 커피를 팔아볼까 생각도 했다. 아니면 남들처럼 노인 일자리를 해보시라고 권유할까도 싶었다. 하지만 썩 내키지 않았다. 돈을 얼마 벌지 못하더라도 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 좋아하시는 일을 할 수 있게 해드리고 싶었다. 여기 마을 어르신들께 노인 일자리 하기 어떤지 물어보면 '돈 주는 건 좋은데 마을 돌아다니면서 쓰레기 주우라고 이런 건 좀 안 했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궂은 일이기도 하지만 별로 재미도 없어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아버지가 그렇게 노인 일자리로 소비되는 건 좀 아닌 것 같더라고요. 마침 가게 1층도 있고 하니 처음에는 아버지한테 커피도 해보시라고 했는데 역시 그건 어려운 일이었고, 가장 아버지답게 할 수 있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아침 일찍 일어나시고 시장 나가는 것도 좋아하고 하루에 10그릇만 팔아도 아버지 용돈은 될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이 먹어보고 막 맛있다고 하니까 아버지도 재미있어 하시고… 예전과는 삶이 좀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 시작한 거죠.
가게 곳곳에는 '서리태 콩국수 6500원'이라고 쓰인 메뉴판이 붙여져 있었다. 직접 디자인과 프링팅을 했는지 메뉴판조차 정감이 갔다. 소민정 프로듀서 애당초 돈을 벌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 오롯이 아버지를 위해, 아버지에 의한 일을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콩국수도 아버지가 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만들어 팔기로 했다. 하루 10그릇. 손님이 좀 있는 날에는 재량껏 몇 그릇 더 내놓기도 한다. 비싼 값을 받는 것도 아니어서 수중에 남는 돈이 얼마 되지 않지만 아버지는 돈으로는 살 수 없는 다른 삶을 얻었다. 그 전에는 술을 엄청 드셨죠. 밥도 안 드시고 아침부터 한 번에 소주 몇 병을 드세요. 식사를 안 하시고 아침부터 계속 주구장창 드셨는데 이제는 본인이 아침에 해야 될 일이 있으니 아침 5시에 일어나 운동 갔다 오시고 손녀 등교를 시켜주세요. 그리고는 가게 와서 콩을 삶아 갈아놓고, 점심이 되면 콩국수를 만들고, 다음날 팔 콩까지 물에 담가놓고 가시죠.
아버지가 이제는 용돈을 달라고 안 하니까 저한테도 괜찮고 하는 거죠. 예전에는 매달 1주일에 한 번씩 용돈 달라는 말을 되게 힘들게 꺼내셨는데 이달에는 진짜 최초로 아버지가 자기가 번 돈으로 방 임대료를 내셨어요.
Q. 이왕 파는 거 값은 올리고 많이 파시지 그러세요
사람들이 너무 싼 거 아니냐라고 하는데 그런 욕심 가지고 했다가는 오히려 더 안 되는 거고, 진짜 감사한 마음으로 많이들 와서 저희 아버지한테도 인사도 하고 그러면 저야말로 오히려 좋은 일이니까. 큰 욕심 안 부리고 재밌게 하고 있어요.
마침 친구가 콩국숫집을 한 적이 있어서 레시피를 물어보니 그 친구 하는 말이 '콩국수 별거 없어'라고 하면서 진짜 별거 없는 레시피를 가르쳐주는 거예요. 뭐 6대 4로 잘하고 거기에 참깨랑 아몬드랑 이런 걸 잘 섞어서만 하면 웬만하면 잘 팔린다고… 그대로 만들어 보니까 실제로도 괜찮더라도요. 아버지도 간을 보는데 확실히 아버지의 입맛이 있더라고요. 가게는 저희 건물에서 운영하는 1층이라서 세도 안 나가고 또 가게까지 찾아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니 싸게 하자 6500원에 파는 거죠.
콩은 인터넷에서 사요. 절대 중국산은 쓰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농부님들한테 좀 사기도 하고, 얼마 전에는 김제에서 콩을 재배하시는 농부님이 되게 싸게 주셨어요. 양도 엄청 아마어마하게. 거의 반값에 사온 것 같아요.
날마다 치솟는 물가에 콩국수 가격을 6500원에 맞추자니 품이 많이 든다. 다행히 콩국수에 곁들이는 반찬은 이웃들에게 공수해온다.
사실 콩국수 가격이 너무 싸다 보니까 김치가 너무 비싸잖아요. 그렇다고 중국산 내놓기도 좀 그렇고 저도 안 먹는데 그걸 어떻게 내놔요. 고민이 많았는데 주변에서 막 가져다주시기도 하고 그래서 그때그때 나가는 반찬은 다르죠. 어떨 때는 누가 오이무침을 갖다주면 오이무침이 나가고 어떤 분이 새 김치 갖다주면 새 김치가 나오고 이렇게 해요.
Q. 여름이 지나면 콩국수는 어떻게 하죠? 계절 메뉴인데…
겨울에는 멸치국수 팔아야죠.
저희 집이 여수니까 여수에서 해산물은 제가 다 받아올 수 있어요. 저희 이모부한테 홍합은 엄청나게 싸게 가져올 수 있어요. 홍합국수나 이런 것들을 한번 팔아보려고요. 겨울에는 멸치국수랑 비빔국수를 팔면서 또 기다려야죠. 아버지가 계속 일할 수 있게…
따끈한 메뉴가 생각나는 계절이 되면 기린토월에 다시 가봐야겠다. "이색 감성" 카페에 멸치국수는 더더욱 어울리진 않겠지만, 안경에 김이 서리도록 온기 가득한 카페에 분주하게 일하고 있을 두 부자의 훈훈한 모습이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