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의 1894~5년 순릉 참봉시 모습. 기독교 개종 직전. 독자 제공▶ 글 싣는 순서 |
①이준 열사, 기독교로 개종하다 (계속) |
1894년 3월에 동학혁명이, 같은 해 6월 일어난 청일전쟁은 1895년 2월 일본의 승리로 끝난다. 청일전쟁 직후 이준(李儁, 1859~1907)은 1895년 3월 순릉 참봉직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4월 16일자로 개설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법률학교 '법관양성소(法官養成所)'에 입학, 6개월 만에 졸업(11월 20일, 제1회)한다.
이준이 법관양성소에 들어가 공부한 것은 신학문에 본격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다. 1896년 2월에 한성재판소 검사보로 취임했으나, 고관의 비행을 탄핵한 죄로 1개월 만에 면관(免官)된다.
1895년 당시 한성재판소는 한성의 정동에 있었는데, 아펜셀러가 설립한 배재학당은 한성재판소로부터 100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한성재판소 인근의 정동에는 감리교 정동교회(貞洞敎會)와 상동교회(尙洞敎會)를 중심으로 기독교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구국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특히 서재필(1864〜1951) 박사는 1895년 11월 미국에서 나와 아펜젤러(1858〜1902) 선교사의 집에 묵으면서 배재학당에서 정치학 강의를 맡고 있었다. 이준은 법관양성소를 졸업한 지 1개월 후인 1895년 12월 말에 서재필과 함께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한다.
이준이 기독교(감리교 상동교회)로 개종한 시기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서재필 박사와 협성회를 조직하기 이전으로 보인다.
이준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데는 의료 선교사 스크랜턴(Scranton, Mary Fletcher Benton. 1832~1909)이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시기인 1896년에 전덕기(全德基, 1875~1914)도 상동교회에 입교한다.
이준이 후일 선각자로서 활동하는데, 이는 그가 만 36세에 받아들인 기독교 신앙에 의한 것이다. 구한말 많은 선각자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것은 기독교의 평등과 박애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고, 이를 바탕으로 한 사회 개혁을 목적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준은 서구 문물 및 사상과 정신(기독교)을 받아들인 후에는 봉건적 왕조를 옹호하기보다는 국민이 직접 선출한 대통령에 의한 민주 정부를 생각했다.
평등과 평화, 사랑의 실천을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적십자사를 만들기 이전에 먼저 민간에서 적십자회를 만들어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이렇듯 이준의 삶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은 당연히 후천적인 것이다. 이준이 기독교인으로 활동하는 데는 같은 시기에 개종한 전덕기 목사의 역할이 컸다.
이화학당. 이화역사관 제공▲ 글쓴이 이양재(69) 선생=독립운동가 이병식 선생의 증손자로 (재)리준만국평화재단 이사장과 (사)한국고서협회 상임부회장으로 고서화감정가이다. 서지학과 회화사학자로 2009년부터 제주에 머물며 제주관련 고서도 수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