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앞 가로수와 가로등 곳곳에 현수막이 무분별하게 걸려 있다. 김혜민 기자 부산의 한 지자체가 시 지정 기념물이자 문화유산 등재 대상에 포함된 부산근현대역사관 건물 앞에 현수막을 무더기로 내걸고 실적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지역에서는 문화유산을 관리하고 불법 현수막을 단속해야 할 지자체가 오히려 불법을 자행하고 경관을 해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79번째 광복절을 앞둔 13일 부산 중구 '부산근현대역사관' 인근 도로.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 가로등 등 곳곳에 다양한 현수막이 내걸렸다. 현수막에는 '중구 최우수상 수상', '중구민 노래자랑' 등 지자체의 각종 실적과 행사 홍보 문구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무분별한 현수막 때문에 길 건너편에서 본 근현대역사관 별관 외벽은 마치 형형색색 현수막으로 도배된 현수막 게시대처럼 보일 정도였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은 1920년대 지어진 건물로, 동양척식주식회사 부산지점으로 사용되다 광복 이후 미국 문화원으로 쓰였다. 1970년대에는 연극장으로 활용됐고 당시 지역 예술인 상당수가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아 꿈을 키웠다. 그러다 1999년 시민들의 요구로 우리나라 정부에 반환돼 근대역사관으로 개관했다.
한국 근대사의 굴곡을 그대로 간직한 부산근현대역사관 건물은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부산시 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됐다. 또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등재된 '한국전쟁기 피란수도 부산의 유산'에도 포함된 건물이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건축물이 현수막에 가려진 모습. 정작 새로 설치된 지정 게시대는 텅 비어있다. 김혜민 기자취재 결과 역사관 건물 앞에 현수막을 설치한 것은 다름 아닌 부산 중구청인 것으로 확인됐다. 구청은 지정 게시대가 아닌 인근 가로수 등을 이용해 현수막을 설치했는데, 이는 관련 법에 따라 명백한 단속 대상이다.
옥외광고물법에 따라 광고물을 설치할 때는 시장·군수·구청장에게 허가를 받거나 신고해야 한다. 지자체는 대부분 지정 게시대를 두고 사전에 신고한 후 현수막을 게시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 때문에 가로수와 가로등에 무단으로 현수막을 설치하는 행위는 금지돼 있다.
역사적 가치를 가진 기념시설을 관리하고 불법은 단속해야 할 구청이 오히려 불법 현수막을 무분별하게 내걸어 기념물의 경관을 훼손하고 있는 셈이다.
지역은 물론 부산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건물 주변 경관이 이처럼 현수막으로 훼손되자 주민 사이에서는 불만과 비판이 이어졌다. 구청이 건물 앞에 버젓이 현수막 게시대를 설치한 점도 이해할 수 없지만 이를 두고 현수막을 불법으로 곳곳에 내건 것도 황당한 행정이라는 지적이다.
주민 A(50대·남)씨는 "근현대역사관은 지역 문화재다.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을 수도 있는데 현수막이 널려 건물을 가리고 있다"며 "구청에서는 현수막을 철거하고 관리해야 하는데 오히려 영구히 설치할 수 있도록 최근에는 지정 게시대까지 만들어놨다"고 비판했다.
부산근현대역사관 별관 앞 가로수 곳곳에 현수막이 묶여 있다. 김혜민 기자
비슷한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다른 지자체에서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한 일선 지자체 관계자는 "지정 게시대 외 현수막 설치는 당연히 안 되는 거고 보통 행정용 게시대가 따로 있기 때문에 실적 홍보 현수막을 이런 식으로 거리마다 걸어두진 않는다"며 "지정 게시대도 기념물로 지정된 건물 앞에는 잘 안 두는데 이해하기 어렵긴 하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중구청은 현수막을 설치할 곳이 부족해 가로수 등을 이용해 설치한 것 같다는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해명을 내놨다.
중구청 관계자는 "현수막 내용을 보니 구청에서 설치한 게 맞다. 원칙적으로는 설치하면 안 되지만 지정 게시대는 한정돼 있고 현수막을 달 곳이 부족하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긴 것 같다"며 "관련 민원이 들어오면 현수막을 제거하는 등 조치하고 있다"고 밝혔다.
건물 앞 새로 설치한 지정 게시대에 대해서는 "평소 불법 현수막이 많이 달리는 곳이다 보니 이달 설치하게 됐다. 주변 환경을 고려해 경관을 해치지 않도록 5단이 아닌 3단으로 낮게 설치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