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비 제공 "SF와 인류학은 미래를 향한 상상이라는 공통적인 지향점을 지니고 있다. SF가 미래에 관한 픽션이라면, 인류학은 미래를 위한 논픽션이다."
픽션과 논픽션을 연결하고, 현실과 상상을 엮어나가는 두 인류학자의 SF적 관점에서 전지구적 문제를 짚어가는 책 '낯선 이야기는 우리 곁에 있다'는 계급 격차와 소수자 혐오, 팬데믹과 전쟁, 기후 위기 등을 동시에 맞닥뜨린 인류에게 기존과는 완전히 다른 질서를 세울 필요가 대두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특히 자본주의와 식민주의, 성장주의가 서로 결탁하여 연결보다는 고립을 택하고, 현실을 냉소하고 절망하기를 강요한다고 꼬집는다.
이 책은 새로운 관점으로 인류학의 지식과 SF의 대안적 허구를 함께 들여다보며 미래에 대한 상상을 자극한다. "인간 멸종은 파국이 아니다. 종말을 맞이한 건 인간이 아닌가?"(마거릿 애트우드)
미국의 SF 작가 어슐러 K. 르 귄의 '빼앗긴 자들'에는 사적 소유와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아나키즘 사회가 등장한다. 저자들은 이 책을 인류학자 피에르 클라스트르의 남아메리카 선주민 공동체 연구 사례와 함께 읽으며 '국가 없는 사회'가 소설에만 존재하는 허구가 아님을 방증한다.
그러면서 독자들에게 진보를 전제하며 미래형으로만 제시된 유토피아가 아니라, 어슐러 K. 르 귄의 말처럼 "애매하고 의심스럽고 신뢰가 가지 않으며 최대한 모호한 방식"의 유토피아로 이끄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라고 전한다.
책은 배명훈의 '타워'를 도시인류학의 관점에서 차별과 불평등을 논하고, 어슐러 K. 르 귄의 대표작 '어둠의 왼손'을 젠더 인류학과 결부시켜 '남성성'과 전쟁에 대해 이야기한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생식과 출산에 관한 인류학의 연구 사례를 옥타비아 버틀러의 '블러드차일드'와, 생태와 환경에 관한 인류학적 논의를 김초엽의 '파견자들'과 연결한다.
저자들은 여덟 편의 SF를 인류학의 논의와 연결시켜 지금까지 당연시해온 세계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며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지금과 다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읽어낸다.
그런가 하면, 페미니즘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는 세 편의 SF를 '가상 민족지'라는 형식으로 다시 쓴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 어슐러 K. 르 귄의 '어둠의 왼손', 옥타비아 버틀러의 '킨' 설정과 줄거리를 마치 인류학자의 연구 사례인 것처럼 가정해 세 편의 SF를 인류학 보고서로 새롭게 정렬한다.
이러한 다시-쓰기는 SF를 동시대 한국 여성의 삶과 긴밀하게 연결하며, 낯설게만 느껴질 수 있는 이야기를 지금 우리의 경험으로 읽히게끔 하는 흥미로운 작업으로 이끈다.
수많은 '타자'로 이루어진 세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어떻게 포용할 것인 이야기 하는 두 인류학자는 눈 앞에 펼쳐진 종말을 새로운 시작으로 만들어가려는 해법을 SF의 세계에서 길어 올린다.
정헌목·황의진 지음 | 반비 | 32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