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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달장애인은 법정에서 '○○○' 요구했다[법정B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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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달장애인은 법정에서 '○○○' 요구했다[법정B컷]

    편집자 주

    수사보다는 재판을, 법률가들의 자극적인 한 마디 보다 법정 안의 공기를 읽고 싶어 하는 분들에게 드립니다. '법정B컷'은 매일 쏟아지는 'A컷' 기사에 다 담지 못한 법정의 장면을 생생히 전달하는 공간입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중요한 재판, 모두가 주목하지만 누구도 포착하지 못한 재판의 하이라이트들을 충실히 보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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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우선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I wanna be known to people first).

    1974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열린 발달장애인 자기 권리 주장 대회에서 한 발달장애인이 '정신 지체'라 불리는 대신 '사람'으로 먼저 존재하고 싶다며 한 말입니다. 이 발언은 발달장애인들의 권리 찾기 운동인 '피플퍼스트(people first)' 운동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7년 전 시설을 나와 비로소 세상에 발걸음을 내디딘 발달장애인 박경인(31)씨도 피플퍼스트 운동을 하며 자신의 권리에 눈을 떴습니다. 내게도 노동권이, 이동권이, 그리고 참정권이 있다는 걸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권리를 반드시 지켜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림의 떡'인 발달장애인의 참정권

    하지만 참정권을 행사하는 여정은 쉽지 않았습니다. 박씨는 시설을 나온 이후 첫 투표를 하러 투표소를 찾았지만, 어떻게 투표해야 할지 몰라 투표를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박씨에겐 선거 공보물의 용어들도, 투표소와 투표용지의 용어들도 모두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발달장애인은 발달이 나타나지 않거나 발달이 크게 지연돼 일상생활에 제약을 받는 장애인을 말합니다.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문자를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어려운 단어나 문장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에는 제약이 있죠. 2019년 기준 전체 등록 장애인 261만 명 중 약 9.2%(24만 명)에 달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참정권에 대한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점자 공보물이나 점자투표용지가 제공되고, 청각장애인에겐 수어통역 등이 제공되지만 이와는 상반되게 발달장애인을 위한 최소한의 장치도 없는 상황입니다. 박씨가 투표를 하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던 이유죠.
     
    그래서 박씨는 용기를 냈습니다. △이해하기 쉬운 형태의 공보물 및 공보물 제작 가이드라인 마련·배포 △이를 위해 공직선거관리규칙 개정 △그림투표용지 제공 △투표소 내 안내판 비치 등을 요구하는 차별구제청구 소송을 제기한 겁니다.
     

    참정권 보장 1심 소송 '각하'…법원도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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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연 소송 결과는 어땠을까요? 지난해 8월, 1심 재판부는 박씨 등의 소송을 '각하'했습니다.
     
    각하란 소송의 요건을 충족하지 못했을 때 법원이 사건 내용을 심리하지 않고 재판 절차를 마무리하는 건데요. 1심 재판부는 이해하기 쉬운 공보물이나 그림투표용지 등을 제작하는 것은 공직선거법에 위반되며, 공직선거법을 개정해야 하는 문제이지 법원이 해줄 수 있는 조치는 없다고 봤습니다.
     
    2023.8.16. 서울중앙지법 민사46부 차별구제청구소송 1심 판결문 中
    원고들의 이 부분 청구는 공직선거법의 개정에 의하여 법률적 근거를 마련한 뒤에서야 비로소 가능한 조치를 입법 없이 구하는 것이어서 법원이 피고에게 원고들의 청구와 같은 구제조치를 명하더라도 피고(대한민국)가 이를 이행할 수 없으므로, 이 부분 청구의 소는 권리보호의 이익이 없어 부적법하다고 보아야 한다.

    실제로 공직선거법 150조를 살펴보면, 투표용지의 기재사항과 기재방법을 명확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공직선거법 제150조(투표용지의 정당ㆍ후보자의 게재순위 등)
    ①투표용지에는 후보자의 기호ㆍ정당추천후보자의 소속정당명 및 성명을 표시하여야 한다. 다만, 무소속후보자는 후보자의 정당추천후보자의 소속정당명의 란에 "무소속"으로 표시하고, 비례대표국회의원선거 및 비례대표지방의회의원선거에 있어서는 후보자를 추천한 정당의 기호와 정당명을 표시하여야 한다.
    ②기호는 투표용지에 게재할 정당 또는 후보자의 순위에 의하여 "1, 2, 3" 등으로 표시하여야 하며, 정당명과 후보자의 성명은 한글로 기재한다. 다만, 한글로 표시된 성명이 같은 후보자가 있는 경우에는 괄호속에 한자를 함께 기재한다.


    그렇기에 해당 법조항이 규정하고 있는 기재사항(소속정당, 성명 등) 외에 그림이나 사진, 로고를 인쇄한 그림투표용지를 제공하는 것은 현행법에 위배돼 허용되지 않습니다. 공직선거법을 개정하지 않는 이상, 그림투표용지를 만들 방도가 없는 것이 현실인 거죠.
     

    발달장애인 참정권 보장되는 '피플퍼스트' 시대는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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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박씨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9월, 박씨는 1심 판결에 항소했습니다. 이번에는 △선거용 보조 기구 제공 △그림 투표용지 제공으로 청구취지를 조금 변경한 채로요.
     
    지난 28일 2심 마지막 변론에서, 재판부는 이에 따라 법리적인 검토를 해보겠다고 밝혔습니다.
     
    2024.08.28.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 변론 中
    판사 : 결국은 그림 투표용지, 그 다음에 선거용 보조기구에 있어서 1심처럼 이 공직선거법 등 관련 법령에 '직접적인 제공에 관한 내지는 마련에 관한 근거 규정'이 명시적으로 있어야 하는지 여부가 먼저 판단되어야 할 것이고요.
     
    이제 그 이후에는 그렇다고 한다면, (그림 투표용지 등을) 제공할 의무가 피고 측에게 있는지를 판단해 보겠습니다.


    박씨가 포기하지 않은 덕에, "법원이 해줄 수 있는 건 없다"던 1심 재판부와 달리 2심 재판부의 태도는 조금 전향적으로 바뀐 듯 보였습니다.
     
    박씨가 불러온 변화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박씨 덕에, 소송이 진행되던 지난해 10월, 정부가 발달장애인들을 위해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제작 가이드>와 <이해하기 쉬운 선거공보 용어집>을 발간하는 성과가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2심 마지막 변론에서 박씨는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재판부의 질문에 자리에서 일어나 준비해 온 원고를 펼친 채 어눌하지만, 강단 있는 말투로 입을 열었습니다. 발달장애인 동료들이 방청석에서 박씨를 바라보는 가운데서요.

    2024.08.28.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 변론 中
    박경인 : 안녕하세요. 저는 발달장애인 당사자 박경인입니다. 저는 발달장애인으로서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무연고자여서 시설에서 살아왔고, 성인이 돼서야 저는 저의 의지로 힘겹게 자립을 했습니다.
     
    발달장애인 당사자로서 저는 처음 투표할 때 너무 어렵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아서 투표를 포기하고 돌아갔습니다. 만 18세 이상의 국민은 모두 참정권을 보장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 지체장애인, 청각장애인 경우 등 특별 보조나 보조도구를 지원해 준다고 하는데 왜 발달장애인은 아무런 배려도 해주지 않는지 묻고 싶습니다.
     
    가까운 나라 대만이나 홍콩에서 그림이나 사진 색깔이 들어간 투표용지를 사용하고…합니다. 왜 우리나라는 사용하지 않는…가요? 그림 투표 용지나 보조도구를…생겨서 발달장애인이 스스로 투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합니다. 발달장애인도 건강한 국민으로 투표할…참여하고 배제되지 않는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이번 소송을 통해 발달장애인에게 힘을 보태주기를 바랍니다. 저의 이야기를…저에게 말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4.08.28. 서울고등법원 민사1-3부 차별구제청구소송 2심 변론 中
    판사 : 너무 말씀을 잘 준비해오셔 가지고 잘 들었습니다. 이 사건 소송을 박경인씨께서 소송을 용기 있게 제기하셨기 때문에 결론과는 별개로 의미가 있다고 보이고, 피고 측도 지금 말씀하신 대로 어쨌든 이 사회가 되게 좋은 방향으로 변화돼 가고 있는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희 재판부는 이제 법리적으로 판단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해서 한번 원고 측이 주장하신 내용에 대해서 저희가 법 테두리 내에서 반영할 수 있을지 한번 꼼꼼하고 세심하게 판단해 보겠습니다.


    박씨의 용기 있는 발언에, 재판부도 진심을 담아 따뜻하게 화답했습니다. 늘 냉기가 맴도는 듯했던 법정이, 온기로 가득 찼습니다.
     
    11월 6일, 이번 소송의 결과가 나옵니다. 과연 이번 소송을 계기로, 박경인씨는 다음 선거 때 당당하게 투표를 할 수 있게 될까요?
     
    사람으로 먼저 존재하고 싶다던, 그렇기에 참정권과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자유롭게 행사하고 싶다던 50년 전 미국의 '피플퍼스트' 정신이 재판부에도 닿기를 소망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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