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대만의 보험 회사나 마찬가지다."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후보 시절 이런 말을 했다. 지난 7월 美 블룸버그 비즈니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다. 미국이 대만을 지켜주기 때문에 보험료 명목으로 돈을 내야한다는 얘기다. 트럼프는 이어 지난 9월에는 워싱턴포스트(WP)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대만은 GDP의 10%를 국방비로 써야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은 지난 9월 대만이 GDP의 10%를 방위비로 지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을 내년도 (2025년) 대만 정부 예산에 그대로 적용한다고 가정할 경우, 대략 114조원을 방위비로 써야하며, 이 액수는 대만 정부 총 예산의 약 80%에 해당한다. 연합뉴스
올해 기준 대만의 국방 예산은 GDP(국내총생산)의 2.45%다. 내년에는 2.56%로 올려 약 200억 달러 (6470억 대만 달러)를 국방비에 쓰기로 했다. 우리 돈으로 약 28조 원이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인의 요구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만약 GDP의 10% 를 내년 예산에 그대로 적용할 경우, 대만의 국방비는 약 114조 원으로 폭증하게 된다. 한국의 내년 국방 예산 61조 5878억원보다 거의 두 배에 가까운 액수다. 이것은 대만 정부의 연간 총 예산의 80%를 넘는 규모다.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말을 따른다면, 대만은 1년 예산을 거의 전부 국방비에만 쏟아부어야 할 판이다.
홍콩의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 신문은 지난13일 대만의 국방비가 GDP의 10%는 아니더라도 5%는 돼야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트럼프측의 안보전문가인 엘브리지 콜비 전 국방부 전략·전력개발 담당 부차관보와 로버트 오브라이언 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의 말을 인용한 예상이다. 근거 없는 추론은 아니라는 뜻이다. 하지만 GDP의 5%로 낮춘다고 하더라도 대만 연간 예산의 절반에 가까운 43%가 국방비로 들어가야 한다. 당장은 실현 불가능한 액수이기는 마찬가지다.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한 2023년 기준 각국의 GDP 대비 국방비를 보면 사우디아라비아 7.1%, 이스라엘 5.3%, 폴란드 3.8% 등이다. 전쟁중인 우크라이나는 군사비에 GDP의 36.7%를 쓰고 있다. 같은 시기 대만은 2.2%로 나타났다. 사진은 대만 육군의 훈련 모습. 대만 육군 홈페이지 캡처하지만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의 시각은 다를 수도 있다. 스웨덴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집계한 국가별 GDP 대비 군사비 지출 자료를 보면 이렇다. 가장 최근 통계가 지난해 (2023년) 기준인데,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 GDP의 7.1%를 국방비로 썼다. 미국과 동맹 이상의 협력 관계인 이스라엘의 2023년 군사비는 GDP의 5.3%다. 이스라엘은 하마스와의 전쟁을 시작한 2023년 뿐 아니라, 그 전인 2021년과 2022년에도 각각 GDP 대비 5.0%와 4.5%의 군사비를 지출했다. 중동 국가 가운데 쿠웨이트 4.9%, 요르단 4.9%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전쟁 상태인 우크라이나는 지난해에 GDP의 무려 36.7%를, 러시아는 5.9%를 각각 군사비에 쏟아부었다. 인접국인 폴란드도 GDP 대비 3.8%를 국방 예산으로 지출했다. 이에 비해 대만은 2023년 기준 2.2%다. 참고로 같은 해 미국의 군사비는 GDP의 3.4%, 한국은 2.8%다.
냉전 시기였던 지난 1980년 우리나라는 GDP의 5.69%를 방위비로 지출했다. 대만의 경우 장징궈 총통의 집권 기간인 지난 1978년부터 1988년까지 약 10년 동안 GDP 대비 평균 7.8%를 방위비로 지출했다. (SCMP, 2024년 11월 13일자 보도) 미국과 중국의 치열한 전략 경쟁 속에 유럽과 중동에서 전쟁이 터지면서, 최근 각국은 다시 경쟁적으로 군사비 지출을 늘리고 있다. 지난 6월 옌스 스톨텐베르그 당시 나토 사무총장은 바이든 대통령과 만난 자리에서, 나토 32개 회원국 가운데 23개국이 올해 GDP 대비 2%의 군사비를 지출할 것이라고 말했다. 마치 냉전시대로 돌아가는 듯하다.
중국은 대만 섬을 점령하지 않고도 수시로 무력을 동원해 위협함으로써 실질적 통제력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트럼프 2.0시기에 대만은 중국의 무력 위협과 미국의 방위비 증액 압력이라는 이중고를 겪을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지난 10월 14일 중국군 동부전구가 발표한 대만 섬 포위 훈련 '연합리검-2024B' 설명도. 중국 국방부 홈페이지 캡처대만에 대한 트럼프의 방위비 증액 요구는 대놓고 미국 무기를 더 많이 사라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사실 미국 말고 다른 나라는 대만에 무기를 팔기조차 어렵다. 그랬다가는 중국과의 갈등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당선인의 말이 실현된다면 대만은 미국의 '봉'이 되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문제는 미국산 무기를 많이 도입한다고 해서 대만의 안보 불안이 쉽게 해소되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상대가 군사 대국이자 경제 대국인 중국이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의 군함과 전투기는 거의 매일 대만의 방공식별구역(ADIZ)을 드나들고 있다. 지난 1955년부터 약 70년간 중국 본토와 대만 사이의 경계선 역할을 했던 중간선도 사실상 무력화됐다. 지난 2021년 8월 낸시 펠로시 당시 美 하원의장의 대만 방문을 계기로 중국은 대만 해협에서의 상시적 군사 활동을 이른바 '뉴 노멀'(new normal, 새로운 일상)로 만들고 있다.
중국은 항공모함까지 동원해 대만 섬을 포위하는 '봉쇄형 군사 훈련'도 늘리고 있다. 지난 2021년 8월 펠로시 하원 의장 방문 직후에 이어, 지난 5월과 지난 10월에도 비슷한 포위 훈련을 실시했다. 중국은 대만 섬을 점령하지 않고도 수시로 무력을 동원해 위협함으로써 실질적 통제력을 점점 높여가고 있다.
중국의 일상화된 무력 시위는 독립을 추구하는 대만인들의 기를 꺾으려는 일종의 심리전의 성격도 띠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대만 정부가 미국에 돈을 퍼주고 이용만 당하다가 결국 버림받게 될 것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트럼프의 무리한 방위비 증액 요구를 계기로 대만인들을 겨냥한 중국의 심리전은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만약 대만 정부의 재정이 방위비 증액과 미국 무기 구매에 대규모로 투입되면 복지나 교육, 인프라 등 다른 분야의 예산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미국은 대만의 반도체 기업TSMC의 미국 투자 확대도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트럼프는 선거운동 기간 중에 "미국의 반도체 산업을 대만이 가져갔다"며 이런 속셈을 내비친 바 있다.
독립 성향의 대만 집권 민진당은 의회에서는 여소야대의 상황에 놓여있다. 트럼프 2.0이 민진당 라이칭더 정부에 일방적으로 압력을 가할 경우 민진당은 중국의 위협과 미국의 압박이라는 이중고를 겪을 가능성이 높다. 사진은 대만의 국경일인 지난 10월 10일 쌍십절 행사에서 손을 흔드는 라이칭더 총통 부부의 모습. 왼쪽에서 두 번째가 라이칭더 총통. 대만 총통부 홈페이지 캡처이런 상황에서도 대만의 집권 민진당 정부는 미국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만약 중국이 대만을 침공한다면 트럼프가 군대를 보내서 막아줄 것인가? 트럼프는 지난 10월 월스트리트저널(WSJ) 편집인과의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중국산 제품에 150~200%의 관세를 물리겠다고 말을 했다. 전쟁에 관세로 맞서겠다는 생각을 드러낸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이것은 미국이 대만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나서지는 않을 것이라는 공언이나 다름없다.
변수는 대만인들의 민심이다. 대만 유권자들은 지난 1월 선거에서 독립 성향의 민진당 라이칭더 총통을 당선시켰다. 하지만 민진당에 의회인 입법원의 과반 의석을 허용하지는 않았다. 민진당이 집권당이지만 의회는 여소야대 상황이다. 앞서 지난 2022년 11월 지방선거에서도 민진당은 야당에 패배 했다. 민진당에 대한 지지가 공고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없다.
대만에서는 제1 야당인 친중 성향의 국민당이 호시탐탐 정권 탈환을 노리고 있다. 본토와의 협력을 통한 안정과 발전을 추구하는 국민당의 재집권은 중국 공산당이 가장 바라는 바다. 트럼프의 대통령직 복귀는 시진핑 주석에게 위기이면서 기회도 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