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30일 오후 대구 한 의과대학 강의실에 의사 가운이 남겨져 있다. 연합뉴스의대 증원에 따른 의·정(醫政) 갈등이 해를 넘겨 지속되는 가운데 국민들의 피로감이 극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국민 과반은 윤석열 정부가 현 상태로는 이 난국을 풀 수 없다며, 기존 의료개혁 정책 노선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봤다.
또
'12·3 내란 사태' 이후 현 사태가 더 악화됐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파악됐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유명순 교수 연구팀은 지난해 12월 20~24일 여론조사 전문업체 한국리서치에 의뢰해 만 18세 이상 전국 성인남녀 1천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건의료 개혁정책에 대한 국민 인식 조사' 결과를 7일 이같이 발표했다.
온라인 웹사이트와 모바일 조사를 병행해 수집한 응답자료의 표집오차 신뢰도는 95%에서 최대 허용 ±3.10%다.
조사의 주요내용은 △보건의료 체계와 정책에 대한 전반적(사전) 인식 △지난해 2월 발표된 정부의 의사 증원 등을 둘러싼 의·정 갈등 (현안)인식 △정책 역능감 및 소통 인식 등이다.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의 절반 이상(54.0%)은 '귀하는 의사증원 정책(내용·절차 등)이 현 상태를 유지할 경우, 정부와 의사단체의 갈등이 해결될 가능성이 얼마나 된다고 보십니까?'란 질문에 '낮다'고 답변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제공그렇게 답한 540명에게 추가로 '그럼 어느 방향으로 갈 때 해결가능성이 있다고 보나'라고 질문하자,
'전혀 다른 제3의 방안'(38.0%)이라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 이어 '기존 정부 방안의 수정안'(35.4%), '기존 의사단체가 제시한 방안'(14.4%)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잘 모르겠다' 또는 '입장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는 12.2%였다. 종합하면,
지금 이대로는 의정 갈등 해결이 난망하다고 보는 국민 '10명 중 7명' 이상은 정부가 의대 증원을 비롯한 정책 전반의 전면 수정, 내지는 일부 손질이 불가피하다고 보는 셈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태 장기화를 돌파할 정부의 접근법을 묻는 문항에 대해 응답자 45.4%는 '의료개혁안을 수정하거나 추진을 보류해야 한다'고 답했고, 9.9%는 '갈등과 문제가 있으므로 개혁안을 전면 무효화·백지화해야 한다'고 밝혔다. 현 방안 그대로 의료개혁을 지속해야 한다는 응답은 37.7%였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제공이들 대다수는 정부가 '의대 2천 명 증원'을 발표한 작년 2월부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의정 갈등이 '막을 수 있었던 사태'라는 데 공감을 표했다. 이렇게 밝힌 전체 69.0%(690명)를 상대로 관련 이유를 묻자,
'사전에 주요 이해관계자의 해당정책 신뢰도를 파악하고 협력을 도모할 현실적 방안을 마련하지 못했다'(61.9%)고 지적했다.
또한 '사전에 전문성 있는 투명한 정책 근거를 확보하지 못한 것'(39.6%)도 사태를 키운 빌미가 됐다고 봤다.
전체 75.5%는 정부와 의료계의 줄다리기가 초래할 결과가 '심각하다'고 답했고, '심각하지 않다'는 응답은 2.4%에 그쳤다('보통'은 22.1%). 대체로 '응급실 등 필수의료 제공에 대한 제한·공백 지속'을 가장 우려되는 결과로 꼽았고, '환자 불안 가중, 불편·피해증가'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다.
정부는 '국민 생명을 살리는 지역·필수의료 개혁'을, 의료계도 국민 관점에서 정부 정책이 '의료개악'임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국민은 분노와 좌절 등만을 느끼고 있었다.
응답자 71.6%는 의·정 정책 갈등에 '부정적 감정을 느낀다'고 했는데, 가장 지배적인 정서는 '분노·짜증·모욕감'(33.9%)이었다. '실망·좌절·낙담'(21.1%), '불안·긴장·두려움'(19.8%) 등도 주된 정서로 꼽혔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제공실제로 국민들은 정부 또는 의사단체가 어떤 결정이나 대응을 할 때 일반 국민과 환자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길 것이라는 데 거의 동의하지 않았다. '신뢰한다' 항목 관련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각각 정부 42.8%, 의사단체 53.7% 수준이었다.
특히 응답자 상당수는 지난달 3일 윤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가 의정 사태 국면을 더 악화시켰다고 판단했다.
전체 44.7%는 계엄 사태가 향후 정책 추진 등에 '불리하게(위기로) 작용할 것'이라고 답해, '(정부에) 유리할 것'(19.7%)이란 응답의 2배 이상을 기록했다.
구체적인 추가 세부답변으로는 '정부의 신뢰 하락 및 정책추진 동력 약화', '소통 및 협의 가능성 부재' 등이 담겼다.
국민들은 의료개혁 관련 의정 갈등 조정 및 해결에서 일반 국민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여겼다. 이 명제에 동의한 응답자 69.6% 외
'국민 역할이 중요하지 않다'(12.1%)고 답한 이들도 과반이 '국민은 의견 개진 등 참여 기회가 없다'를 들어, 실제 의사보다는 상황에 의한 '체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응답자 75.1%는 의정 간 대립에서 국민·환자가 소외되기 쉽다고 밝혔고, 74.5%가 양측의 갈등을 조정·해결할 만한 힘이 없다고 답했다.
한편,
상당수의 국민은 의료개혁 필요성 자체에는 동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응답자 87.6%는 의사인력의 지역별·진료과별 배치 불균형을 '심각한 문제'라 봤고, 과반(57.7%)은 '평소 의사 수가 모자란다고 생각'했다.
다만, 그러면서도 정부의 '2025년도 의대 2천 증원'에 대해서는 27.2%만이 '증원 시기와 규모 모두 동의'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29.0%는 규모와 시기 모두 부적절하다고 답했다.
서울대 보건대학원 제공과제별 동의 수준에서는 '지역의료 강화'(76.3%)가 가장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조사 결과를 두고 이태진 서울대 보건대학원장은 "과반 이상의 국민이 의사 수가 부족하며 의대 증원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의대증원 정책 시행 절차나 방법에 문제가 있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지역의료 확충을 위한 개혁안에 대해서도 "정부 개혁안의 수정 내지 속도 조절이 필요하다고 인식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번 조사 설계와 진행을 맡은 유명순 교수는
"정책 방향과 목표에 타당성이 있어도 추진과정에서 불거진 갈등과 그 여파를 심각한 문제로 인식하게 된다면 그 정책의 성공 가능성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크다"고 분석했다. 향후 국민과 환자의 정책 참여 및 권한 제고 여부가 의료개혁의 성공을 좌우할 거라고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