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술버릇이 심한 아버지와 공황장애가 있는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김모씨는 10대 때부터 불안 증세가 있었지만 제대로 된 진료나 치료를 받지 못하며 자랐습니다. 이후에도 많은 술을 마시던 김씨의 아버지는 간경화증으로 사망했고 이는 김씨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습니다.
여러 어려움을 극복하고 잘 성장한 김씨는 대한민국 최고라고 평가되는 A기업에 취업해 스마트워치 등의 전자기기를 개발하며 20년 동안 근무했습니다. 40대 중반이 된 김씨는 상사와의 갈등으로 회사를 그만두고 지난 2016년 베트남으로 건너가게 됐습니다. 다행히 A회사의 현지법인에 취직해 일하게 됐지만 베트남에서의 삶은 그리 녹록지 않았고 2년 정도 뒤인 2018년 12월 이민을 위해 미국으로 넘어갔습니다. 이른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기 위한 도전이었지만 환경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김씨는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시한다고 배우자 등 가족들에게 호소했습니다. 김씨의 상황은 쉽게 개선되지 않았고 2020년 들어서는 중증 우울증 증세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정신적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던 김씨는 2021년 5월 어느 날 코로나19 백신을 접종했고 당일 심한 오한과 몸살 증세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유족들은 김씨가 바로 다음날 세상을 등질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유서를 남기는 등의 신병을 정리하는 행동이 없었고 당일에도 자녀를 집으로 데리고 오고 가족들과 저녁 식사를 하는 평범한 일상을 보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법정B컷'은 법원이 극단적 선택 사건에도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사례가 늘고 있지만, 보험금을 지급받기 가장 어려운 사례라고 평가되던 이른바 '목을 맨 극단적 선택' 민사소송의 뒷얘기와 법정 모습 등을 깊숙이 들여다보려 합니다.
갑작스러운 퇴직, 아메리칸 드림 도전…취업 실패 속 코로나19

김씨는 2016년 상사와의 갈등으로 20년 정도 다닌 A기업을 갑작스럽게 그만두게 됐습니다. 이후 베트남으로 건너간 김씨는 A회사의 베트남 현지 법인에 취업해 2년 정도 근무하다 미국 이민을 도전하게 됩니다. 미국 국익에 기여할 수 있는 능력이 증명된 사람들에게 나오는 영주권, 즉 '고학력자 독립 이민 프로그램'에 지원하기로 마음 먹었기 때문입니다. 영주권이 나오기 전 김씨는 A회사의 미국 현지 법인 등에 취업을 타진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어학원을 다니는 등 여러 노력을 이어갔지만 언어 장벽과 문화 차이는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김씨가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서 압박감은 심해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적대시한다는 등의 정신적 고통을 겪던 김씨는 2020년 3월 로스앤젤레스 소재 한 병원에서 조현병 및 우울증약 등을 처방 받았습니다. 같은 해 9월 김씨의 가족으로부터 증상이 악화됐다는 이야기를 전달받은 의사는 김씨를 응급실로 데려가 치료 받도록 권고하기도 했습니다. 같은 해 11월부터 이듬해 2월 중순까지는 다른 병원의 신경정신과 전문의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이후에는 코로나19가 확산되면서 유선(영상) 상담으로 대체했습니다.
▶미국 병원 두 곳의 김씨 사망 관련 답변 |
"마지막 검사와 환자가 자살로 사망한 날 사이에 상당한 시간이 있긴 하지만 환자가 앓고 있던 심한 우울증과 정신병에 압도돼 이런 통제 불가능한 행동을 야기했을 수 있습니다" "심각한 불면증상이 거의 매일 약 일 년간 지속됐으며 체중조절이나 내과질환이 없는 상태임에도 심각한 체중감소를 보이는 상태였습니다. 정신운동지연현상이 뚜렷하게 나타나서 언어표현이나 신체동작이 느려진 반면에 끊임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호소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확인됐습니다" |
2020년 3월과 9월 김씨를 진료한 의사는 김씨의 사망과 관련해 '상기 환자의 사망 행위가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벌어진 일인지'에 대한 질의에 "환자가 앓고 있던 심한 우울증과 정신병에 압도돼 통제 불가능한 행동을 야기했을 수 있다"고 답변했습니다. 김씨를 상담한 신경정신과 전문의는 정신의학 의견서에서 "언어표현이나 신체동작이 느려진 반면에 끊임없는 불안감과 초조함을 호소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던 것으로 확인됐다"고 기술하는 등 김씨가 사건 발생 당시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고 분명히 판단했습니다.
보험사, 사망보험금 청구 '거절' 했지만…유족 결국 '승소'
연합뉴스김씨는 2015년 계약한 보험이 있었습니다. 김씨가 숨진 이후 유족(원고)은 사망보험금을 지급하라고 보험사(피고)에 청구했지만 거절 당했습니다. 이후 유족은 법무법인과 손해사정사와 함께 보험금을 재청구했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습니다. 보험금 청구 소멸 시효(사건 발생 기준 3년)가 채 1년도 남지 않은 2023년 7월 김씨의 유족은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유족들은 미국에서 거주하고 있었지만 이렇다 할 수입원이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원고가 잘 출석하지 않는 민사재판의 특성도 있지만 형편이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김씨 유족은 재판에 직접 출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김씨의 유족은 소송대리인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통화는 5분 정도 이어졌지만 두 사람이 나눈 대화는 없었고 가족은 흐느껴 울기만 했습니다.
이 소송의 1심과 2심을 모두 대리한 법률사무소 지율의 임승민 대표변호사는 "김씨를 잃고 마땅한 수입원이 없는 상황에서 가족들이 어렵게 지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밤새 걱정이 많았다"며 "다음 달 다시 전화를 걸어 위로의 이야기를 건네고 소송을 잘 마무리해보자라고 의견을 나눴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상 극단적 선택 사건 관련 사망보험금 청구 재판에서는 보기 드문 재판부의 화해권고가 두 차례 있었습니다. 오랜 법적 공방 등으로 지친 김씨의 유족은 이를 받아들이려 했지만 보험사가 수용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송을 제기한 지 1년 정도가 지난 작년 6월 1심 선고가 내려졌습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903단독 정성균 판사는 원고 승소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판부는 원고가 청구한 보험금 총 3억 5천만 원을 모두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2024.6.13. 서울중앙지법 민사 903단독 정성균 판사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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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면서 영주권 취득 등이 여의치 않자 우울증으로 고통을 겪고 자살충동을 느낀 것으로 짐작된다. 망인을 치료했던 주치의들 또한 '망인이 중증 우울증 등을 앓았고 자살 성향이 있다거나 만성적인 자살 생각에 시달린다'고 판단했다. 망인이 우울증 외에 자살을 선택할만한 뚜렷한 동기가 엿보이지 않으므로 본인으로서도 어쩔 수 없었던 충동 탓에 자살에 이르게 됐다고 판단된다. 단순히 끈으로 목을 매 사망에 이르렀다는 이유로 이를 자유로운 의사결정에 의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부당하다. 즉, 망인은 이 사건 사고 당시 우울증 등의 정신질환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했고 이 사건 사고는 보험금 지급 면책사유의 예외에 해당한다. |
정 판사는 "우울증 등으로 자살을 실행에 옮기는 경우 자살의 의미를 몰랐다기보다는 자신도 제어하지 못하는, 반복되는 충동 탓에 어쩔 수 없이 자살을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스스로 나름 노력했지만,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경우는 원칙적으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행동한 것이라고 판단함이 타당한다"고 판시했습니다.
'김씨의 고의로 사망 사건이 발생했고 도구 등을 미리 준비한 점 등을 고려하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충동적 상태에서 자살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보험계약 약관에 따른 보험금 지급 면책사유에 해당한다'는 보험사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판단한 겁니다.
하지만 보험사는 항소했고 2심 재판 선고는 지난해 11월 내려졌습니다. 서울고등법원 제22-1 민사부(성수제 심담 조인 부장판사)는 보험사의 항소를 기각했습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의 항소 이유는 1심에서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제출된 증거를 보태어 보더라도 1심의 사실인정과 판단은 정당하다"고 판단했습니다. 보험사 측에서 상고하지 않으면서 항소심 결과는 확정됐습니다.
▶2024.11.7. 서울고등법원 민사 제22-1 민사부 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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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의 항소를 기각한다. 피고의 항소이유는 1심에서의 주장과 크게 다르지 않고 1심에서 제출된 증거에 법원에 증거를 보태어 보더라도 1심의 사실인정과 판단은 정당한다고 인정된다. |
극단적 선택 OECD 1위…중요한 '심리적 부검'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 박종민 기자통계청 사망원통계에 따르면 2023년 대한민국의 10만 명 당 사망원인별 사망률에서 극단적 선택(27.3명)은 각종 암과 뇌혈관 질환, 심장 질환에 이어 4번째로 많았습니다. 여러 합병증으로 이어져 많은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것으로 알려진 당뇨병보다 더 많은 사망자가 극단적 선택으로 인해 발생하고 있습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사망률 1위 국가라는 수식어는 늘 따라 붙습니다.
극단적 선택 사건이 많은 만큼 관련 법원 판결은 주목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해에는 생전 정신과 진료를 받은 기록이 없더라도 우울증에 빠져 극단적 선택을 했다면 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지난해 5월 대법원 1부(주심 오경미 대법관)은 한 항공우주업체에서 근무하다 사망한 B씨 유족들이 낸 보험금 소송에서 원고 패소 판결을 내린 원심을 파기하고 돌려보냈습니다.
▶2024.5.9. 대법원 선고 |
사망한 사람이 생전에 주요 우울장애 진단을 받았거나 관련 치료를 받은 사정이 없었다고 하더라도 법원으로서는 자살에 이를 때까지의 경위, 사망한 사람이 남긴 말이나 기록, 주변인들의 진술 등 모든 자료를 토대로 사망한 사람의 정신적 심리 상황 등에 대한 의학적 견해를 확인하는 등의 방법으로 주요 우울장애로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자살에 이른 것인지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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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질환 진단이나 치료를 받은 이력이 없더라도 이른바 '심리적 부검' 등을 토대로 법원은 망인이 자유로운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는지를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의 판결이 내려진 것입니다. 극단적 선택으로 숨진 망자가 자유로운 의사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였다는 것을 의료 기록을 통해 반드시 입증될 필요는 없다고 본 것입니다.
목을 맨 극단적 선택 사망보험금 지급, 대법원 판례는 적었다
대법원과 서울고등법원 등 항소심 재판부에서도 극단적 선택 사건에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판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특히 김씨의 사망 경위처럼 목을 맨 극단적 선택의 경우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드물었습니다. 무엇보다 목을 맨 극단적 선택으로 사망하기 위해서는 도구를 준비하고 장소를 정하는 등의 자유로운 의사 판단이 가능했다고 보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실제 목을 맨 극단적 선택에 대해 사망보험금을 지급해야 한다는 취지의 대법원 판단은 손 꼽을 정도로 적은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목을 맨 극단적 선택 사망보험금 지급 관련 대법원 판례가 적은 이유에 대해 법조계에서는 보험사가 2심에서 패소할 경우 굳이 상고를 하지 않는 보험사들의 선택이 반영된 것이라는 시각도 나옵니다. 극단적 선택 사망보험금 지급에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를 바라는 상황에서 패소 가능성이 있을 경우 굳이 상고를 해 대법원 판례를 늘리지 않는다는 분석입니다. 김씨의 사례에서도 1심 재판부의 화해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소를 했던 보험사가 상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보험금 관련 소송 대리 경험이 많은 한 변호사는 "보험사를 상대로 한 소송에서 항소심까지만 승소하면 잘 마무리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돈다"며 "정확한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당연하게 예상되던 상고를 보험사가 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열심히 달려온 김씨, 뒤늦게 나온 영주권…유족은 3년을 싸웠다
김씨가 그토록 간절히 기다린 영주권은 김씨가 사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습니다. 앞선 언급한 고학력자 이민 사례로 인정됐다는 점에서 김씨가 얼마나 열심히 살아왔는지가 간접적으로나마 입증된 셈입니다. 코로나19라는 유례없는 엄혹한 시기였지만 만약 영주권이 조금만 더 일찍 나왔다면 김씨의 취업은 보다 쉬웠을 것입니다. 김씨가 극단적 선택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김씨의 유족들은 김씨가 사망한 이후에도 생업을 이어갈 수 있는 마땅한 방안을 찾지 못하다 결국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씨를 대리한 임 변호사는 "김씨 가족이 소송을 통해 사망보험금을 지급받게 된 것은 다행이지만 3년이라는 기간이 너무나도 힘들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며 "법원 판결 등으로 나타나는 극단적 선택 사망보험금 지급에 대한 변화된 사회적 흐름이 반영된다면 소송으로 이어지는 사례는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예방 상담전화 ☎109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