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진행자>오늘 사단법인 한국 선교 유적 연구회 회장이자 전 공주대 총장이신 서만철 장로님 초대했습니다. 장로님 안녕하세요. 해외 사역이 있으셔서 다녀오셨죠?미국에서 귀국하신 지 몇일 안되셨죠?
◆ 서만철>CBS 만나 방송때문에 조금 일찍 귀국했습니다.
◇ 진행자>그러시군요.. 시차 적응도 안 되시고 여독도 아직 풀리지 않으셨을 텐데,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드려요.
◆ 서만철>네. 불러주셔서 고맙습니다.
◇ 진행자> 청주 교계는 방송 전에 들으셨던 것처럼 민노아 선교사님 사역을 재조명하는 사역들로 많이 분주하고, 열정이 뜨겁게 타오르고 있거든요. 그런데 이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준 단체가 장로님이 회장으로 계시는 (사) 한국선교유적연구회잖아요. 어떤 단체인지 소개 부탁드립니다.
◆ 서만철>네. 과찬을 해주신 것입니다. 아무튼 제가 한 6년 전에 와서 여기 청주의 기독교계 지도자들 만나서 설명도 드리고, 불을 지르고 갔는데 이제 좀 불이 붙어서 진행이 되는 것 같습니다. 저희 한국선교유적연구회는 10년 전에 국가유산청, 그 당시에는 이제 문화재청이었죠. 국가유산청에 사단법인으로 등록하고 140년 전부터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오셔서 남겨놓은 유적을 잘 보존하해서, 다음 세대한테 물려주고 그 유적을 통해서 , 신앙 회복을 하는 그루터기 역할을 하게 하자는 취지에서 결성됐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한국선교유적들이 방치돼 있었죠 ?
◆ 서만철> 네.그렇다고 볼 수 있어요.
◇ 진행자>새롭게 눈을 뜨니 이렇게 귀한 보석이 있었던 겁니다.
◆ 서만철>나름대로 보존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신 부분도 있는데 좀 더 체계적으로 가치를 좀 더 확실하게 부여하는 그런 일들이 필요했던 것 같아요.
◇ 진행자> 국내 기독교 선교역사는 한국 사회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기 때문에 국내 선교 유적지를 보존하는 것은 한 시대의 문화 유적을 보존하는 거나 다름없잖아요. 연구회에서 주로 어떤 사역을 하고 계신지도 소개해 주세요.
◆ 서만철>저희들이 선교 유적들을 보호하다 보니까 선교사들이 어떤 일을 하셨는가를 자연스럽게 알게되고, 또 당연히 알아야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우리 한국 사람들한테 기념비가 될 만한 그런 인물들도 많이 있어 그런 분들에 대해서는 기념관을 건립하는 그런 운동도 펼치고 있고, 동상 건립도 하고 있고, 또 방송에 다큐를 만들 수 있도록 지원도 하고 , 선교 유적지를 순례하는 프로그램도 운영을 하고 있어요. 특히 선교 유적지에서 선교사들이 어떤 활동을 했는가 그런 것들을 학술적으로 규명하는 선교 유적 학술회의도 진행을 하고, 궁극적으로는 저희들이 한국의 기독교 선교 유적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를 하자는 그런 운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 진행자>국내여행길에 선교 유적지를 만나게 되면 그렇게 설레고 반가울 수가 없더라고요. 그 선교 유적지를 정례적으로 찾아다니는 순례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계셨군요 ?
◆ 서만철>네. 저희들이 봄에 한 번, 가을에 한 번. 어차피 사람들이 봄 되면 또 어딘가 한 번 나가고 싶잖아요. 또 가을도 그렇구요. 그럴 때 경치 좋은 곳을 가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우리한테 믿음을 전해준 분들이 남겨놓은 유적을 답사하고 , 돌아보고, 또 감동도 받고 하는 일도굉장히 의미 있는 일이라서 기쁜 마음으로 프로그램을 진행 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네. 그렇게 유적지 순례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의미와 재미를 겸한 나들이가 되겠죠? 마지막으로 방송에서 장로님 뵌 것이 윌리암 선교사 한국이름이 '우리암' 선교사라고 하시더라고요? 윌리암선교사 후손을 초청하는 행사 때였던 것 같은데, 한국 땅 특히 공주 땅에 복음 전파를 위해서 헌신한 선교사님 후손들을 초청하는 보훈 행사를 소개할때 였는데, 그 이후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 서만철>윌리엄스 선교사, 한국 이름은 '우리암' 선교사인데 선교사님들이 그 당시 조선 사람들이 영어로 발음하면 이 기억이 안되기 때문에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 꼭 한국 이름을 하나씩 지었어요. 그래서 윌리엄 선교사는 발음이 비슷하게 '우리암' 이렇게 지어불렀다고 합니다..
◇ 진행자> 그럼 윌리엄스 선교사님은 '공주 우씨' 시조가 되시나요?
◆ 서만철>그렇죠. 윌리암스 이분은 충청남도 ,그러니까 오늘날의 대전 세종 충청남도를 포함하는 전 지역의 감리교 선교 책임자로 활동을 하셨던 분인데 ,이 충청북도의 일부 충주지역 또 천안하고 가까운 진천, 이런 지역들도 담당하셔서 감리교 선교를 하셨던 분입니다. 윌리암스 선교사, 그분 후손들을 초청해서 만난게 벌써 3년 전이네요.
2022년에 광복절에 초청을 했었으니까, 그때 후손 27분을 초청을 해서 감사 행사를 했었는데, 그 이듬해에 한국선교유적연구회에서 공주시를 통해서 정부의 윌리암스 선교사를 훈장 상신을 했어요. 그게 보훈부에서 받아들여져서 2023년 그러니까 ,재작년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그 후손 대표들이 와서 대통령한테 직접 훈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건국하는데 기여를 했다그래서, 건국 포장이라는 책장을 받았습니다.
◇ 진행자>윌리암 선교사님 후손들은 생각지도 못하셨을 것 같아요. 증조 할아버지때 일이 되나요?
◆ 서만철>그렇죠. 증조 할아버지 때문에 이런 영광스러운일이 있었습니다.
◇ 진행자>네. 자부심을 많이 가졌을 것 같아요.
◆ 서만철>윌리엄스 선교사 후손들이 큰 자부심을 가졌죠. 2025년 올여름에도 그때 못 왔던 후손들을 데리고 오겠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 진행자>그렇군요. 그분들이 오셔서 공주 지역에 선교지 순례를 또 하게 되겠군요.
◆ 서만철>그렇죠. 자기 할아버지 묘소가 거기 모셔져 있기때문에 당연히 가겠죠?
◇ 진행자> 우리나라에는 그 양화진의 선교사 묘역이 있을 만큼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는데, 당시에 얼마나 많은 선교사들이 들어왔는지 궁금합니다.
◆ 서만철> 우리나라에 해방 전까지, 141년 전인 1884년부터 1945년 해방 전까지 한 1500명 선교사들이 왔어요. 정확하게는 1529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리고 한국 선교 100주년이 되는 1984년도까지는 3천 명 정도 되는 선교사들이 왔고요.
한 100년 정도에 3천 명이다 하면 숫자가 많은지 적은지 이게 감이 잘 안 잡히는데, 미국 선교부에서 그 당시에 전 세계로 선교사를 보냈는데, 미국 선교부의 발표에 의하면, 그 당시 조선 땅에는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보다 선교사를 많이 보냈다고해요.. 평균 보내는 숫자의 3배를 보냈다고 발표를 하고 있어요. 그 덕분에 우리가 기독교가 이렇게 부응하는 그런 역사를 갖게 됐지 않았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기독교 2천년 선교 역사 중에 한국의 기독교 선교는 상당히 성공적으로 평가받고 있는데, 그게 결국은 그렇게 선교사님들이 많이 오셔서 목숨을 걸고 복음을 전파했기 때문으로 보고 있습니다.
◇ 진행자>많은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고, 또 우리 민족이 착하고 부지런하잖아요. 맞죠? 기독교가치관과 어쩌면 잘 맞았는지도 모르겠어요. 선교사님들 이 많은 선교 활동을 하셨고 ,또 우리도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잖아요 ?
◆ 서만철>세계에서 인구 비례로 따지면 가장 많은데, 숫자로는 미국 다음으로 많다고 봐야겠죠?
◇ 진행자>네. 한국선교초기에 백인 선교사님들이 선교 활동 중에 많이 돌아가셨죠 ?
◆ 서만철> 풍토병과 질병으로 많이 돌아가셨죠?
◇ 진행자>네. 충북 선교회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민노아 선교사님의 아내 되시는 선교사님, 자녀분들 다 풍토병으로 돌아가신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포기하지 않으니, 참 감사한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기독교 유적지다' 이렇게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지역마다 각기 다른 특징이 있는 선교지들이 있죠. 이 시간에 좀 정리를 해 주시죠.
◆ 서만철>네. 선교사님들이 이렇게 많이 들어와서 개인적으로 막 흩어져서 이렇게 활동을 했다기보다는 어느 도시에 선교를 해야 되겠다고 하면 ,그 도시 중심부 외곽에 땅을 한 5만 평 내지 10만 평을 확보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미국 선교부, 캐나다 선교부 같은 데서 자금을 보내서 땅을 확보한 다음에, 그 내부에 남학교도 짓고 여학교도 지었어요.
그때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같이 앉아서 공부를 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남학교 짓고, 여학교 짓고, 병원 짓고, 그다음에 교회 그다음에 선교사님들이 살 수 있는 집을 또 한 5채, 6채 이렇게 짓고, 또 이제 중간에 순교하시는 분들 돌아가시는 분들 모실 수 있는 선교사 묘지를 넣고, 이렇게 해서 '남학교' '여학교' '병원' '교회' '선교사사택' '선교사 묘지' 이렇게 6가지 시설이 복합적으로 들어가게 했는데, 그거를 이제 '선교 기지' 라고, 이렇게 불렀어요. 미션 스테이션!
그 미션 스테이션이 지금부터 100년 전에 전국에 37개 도시에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얘기죠? 그러니까 오늘날 대한민국 땅에 23개 도시 북한의 11개 도시 우리 동포들이 살던 만주 이런 데, 3개 도시 이렇게 해서 37개 도시를 전 국토를 융단 덮듯이 이렇게 선교기지가 만들어졌어요.
그래서 동시 다발적으로 미션스테이션이 세워졌는데, 교단별로 보면 선교사들이 가장 많이 들어온 교단이 장로교인데, 장로교 선교사들이 한 45%, 그다음에 감리교 선교사들이 한 28% ,그 정도 되고 다른 이제 침례교나 다른 교단들이 한 5% 내지 6%씩 이렇게 이루어졌는데, 선교 교단들이 다르다 보니까 ,서로 같은 지역에서 경쟁하면서 하면 효율이 안 일어나고, 서로 또 안 좋은 일도 있을 수 있으니까 ,주로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많으니까 그 두 교단 사이에 선교지 예약 협정이라는 걸 맺어서 서로 경쟁하지 말고, 더 효율적으로 선교하자 이런 협정을 맺게 됐습니다.
이 협정에 따라 경기도, 황해도, 강원도 충남 이런 데는 감리교가 맡아서 선교를 하고 , 청주가 있는 이 충북하고 경북은 미국의 북장로교에서 맡아서 하고 ,호남 지역인 전라남북도는 미국의 남장로교가 맡아서 하고 ,또 부산 경남 지역은 호주 장로교가 맡아서 하고, 함경도 이런 데 추운 곳은 추운 데서 온 캐나다 장로교 선교사들이 맡아서 하고, 이렇게 좀 나눠서 선교했구요.
조금 늦게 온 침례교는 오지 선교 원칙에 따라서 선교사가 안 들어가 있던 금강 주변에 강경과 공주 주변으로 이렇게 선교를 했는데, 지역별로 이렇게 교단이 나눠서 선교를 했던 그런 특징을 보이고 있습니다.
◇ 진행자>네. 총장님 말씀 듣고 보니까 청주의 기독교 문화 중에 하나인 탑동 양관도 그렇게 학교가 들어서고, 소민병원이 들어서고, 교회가 들어서고, 말씀하신 이제 선교사 묘역도 있잖아요. 민노아 선교사님도 거기 묻혀 계신데, 말씀하신 그 공식에 딱 맞는 거 같습니다.
◆ 서만철>청주 선교 기지도 그 37개 도시 중에 하나죠.
자료사진◇ 진행자>그렇군요. 청주의 기독교 문화 유산 중 하나인 유형문화재 133호로 지정된 탑동 양관의 역사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는지도 좀 들려주십시오.
◆ 서만철>이 청주 선교 기지는 사실 이 기독교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기독교를 믿지 않는 일반인들한테도 청주 선교 기지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청주뿐만 아니라, 충북 전체의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죠. 그래서 이곳을 통해서 서양 문화가 들어오고 ,서양 문화가 전개됩니다. 그런 중요성을 가지고 있어서 결국은 충북 지역의 청주를 중심으로 한 충북 지역의 근대화 의 모태가 되는 곳이라고 평가를 할 수가 있죠.
하여튼 충북 지역의 선교의 중심지뿐만 아니라 종교를 넘어서 청주 사람들이 서양 문물을 접할 수 있는 곳, 문화 교류의 장이 되기도 했고, 그런 근대화의 모태가 된 곳이라고, 이렇게 평가를 할 수가 있습니다.
◇ 진행자>네. 실제로 신문물들이 많이 들어왔고, 일단 계몽 운동도 이곳을 중심으로 그렇지 펼쳐졌다고 들었어요.
◆ 서만철> 농촌 계몽 운동, 남녀 평등 사상이라든지 ,그다음에 각종 스포츠 야구나 배구나 축구 이런 서양 스포츠들이 다 이런 선교 기지를 통해서 전파가 됐던 것입니다.
자료사진◇ 진행자>그 흔적으로 남아 있는 게 양관이잖아요. 이 탑동 양관이 국내 선교 유적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지금 준비 중인데, 역사적인 의미도 좀 말씀해 주십시오.
◆ 서만철>세계유산이 되는 것은 기독교인 의 시각에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일반 한국 사람들, 또 전 세계 사람들이 봤을 때도 세계적인 유산가치가 있다고, 인정되는 것들이 세계유산이 되는 것들이거든요. 그래서 이 세계유산을 선정하는 기준 중에는 서로 다른 문화권 사이에 문명의 교류가 있었던 뚜렷한 증거가 되면, 세계유산이 될 수 있는 그런 조건이 있어요.
세계유산 선정 기준에는 한 6가지가 있는데, 그중에서 두 번째 조건이 그런 게 있어요. 서로 문명권이 다른데 문화 교류를 한 흔적이 있다는 증거가 있습니다. 그 기준에 이것은 딱 맞는 거예요. 너무나 적합해 서양 문물이 이 충북 지역에 들어오는 그 창구 역할을 했다는 기준에 정확하게 부합이 되기 때문에 보존이 잘 되고 관리가 잘 되면, 이 세계유산으로 선정될 수 있는 요건을 갖추고 있다고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 진행자>선교사님들이 남긴 편지라든가 기록을 보면은 ,그들의 삶과 사역이 단순하게 종교적인 헌신을 넘어서 ,우리나라 민족 교육이라든가 독립운동에 무엇보다도 영향을 주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 대표적인 사례가 공주 지역의 사례 아닐까 싶습니다.
◆ 서만철>네. 공주 선교 기지에는 영명여학교라고 있었는데, '영명'이라는 뜻이 영원한 빛이거든요. 영원한 빛이 이제 예수님을 의미하잖아요. 우리 기독교인으로서는 그 영명여학교의 유관순 열사가 2년을 학교를 다녔어요. '사애리시'라는 선교사님이 천안 병천에서 유관순을 13살 때 데리고 와서, 2년 동안 양녀로 삼아서 가르치다가 이제 아주 똑똑하고 장래가 촉망되니까, 자기가 옛날에 선생님으로 있던 이화학당에 교비 장학생으로 이렇게 장학금까지 마련해서 학교를 보내줬던 곳이죠.
그래서 공주 선교 기지는 독립운동을 하는 데 많이 기여를 한, 물론 유관순이라는 인물로 대표 되지만 ,그 이외에도 충청남도의 3.1 독립운동은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이 영명학교 출신들이 주도를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까 말씀드렸던 우리암 선교사가 영명학교를 교장 선생님으로 운영하면서 ,교훈에다가 뭐를 넣었냐면 '나라와 겨레를 위하여 몸 바치는 애국자를 기른다' 이런 교훈을 넣어서 학생들을 가르쳤어요.
그게 일제시대 때 경찰과 헌병의 감시가 아주 철저한 그런 시대에 그런 교훈을 가지고 학생들을 가르쳤다는 것은 우리한테 주는 교훈이 굉장히 큰 거예요.
◇ 진행자>이제 곧 3.1절이 다가오는데요. 들어야 될 얘기가 너무많아요.. . 총장님 그때 다시 한 번 나와서 이 독립운동 이야기 들려주십시오.
◆ 서만철>네. 그러겠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가 3.1운동 100주년인 2019년에 유관순 열사 13살과 13살 소녀 유관순과 그 스승 사애리시 선교사 가족 동상을 우리가 공부했던 영명여학교에다가 세웠어요. 그때도 상당히 감동이 있었죠.
◇ 진행자>네. 공주의 백제 문화 유적이 유네스코 등재되는 과정에서 총장님께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신 걸로 저희는 알고 있거든요 ?
◆ 서만철>먼저 깃발을 들었죠.
◇ 진행자>네. 그때 경험이 이제 국내 선교 유적지 유네스코 등재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 서만철>네. 그 백제 유적도 이제 공주와 부여 또 전라북도 익산에 있는 세 도시에 있는 유적들을 하나로 묶어서. 연속 유산이라고 하는데, 그것이 한 15년 정도 운동을 해서 세계유산으로 등재가 됐습니다. 그 과정에 이제 많은 사람들이 함께했고, 처음에 그렇게 하자고 깃발을 들었고, 또 계속 가다가 멈추고, 멈출 때마다 또 기여를 좀 했습니다.
자료사진◇ 진행자>네. 이제 기독교 문화 유네스코 등재는 어떤 절차가 남아 있는 걸까요?
◆ 서만철>그래서 지금은 저희가 이제 아까 37개 선교 기지, 또 남한 한국 지역의 23개 선교 기지라고 그랬는데 ,일단 조사를 해보니까 초창기 모습을 완벽하게 갖춘 곳은 아쉽게도 한 군데도 없습니다. 이제 전쟁을 거치고 50년대 ,60년대 이 보리 고개를 넘기고 하면서, 그런 걸 잘 보존하는 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어요.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고 지금 우리가 조사를 해보니까 그 당시 시설의 한 70% 정도를 가지고 있는 도시가 한 8개 도시가 됩니다. 청주도 보존이 비교적 잘 된곳 중 한곳이죠. 그래서 그런 8개 도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이렇게 좀 등재를 시키려고 ,지금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 진행자>어느덧 시간이 다 됐는데요. 국내 기독교 선교 유적의 보전과 또 유네스코 등재로 인해서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당부하고 싶으신 말씀이 있으시면 또 전해 주십시오.
◆ 서만철>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가장 큰 무기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향한 기도가 되겠죠. 그래서 이 세계유산이 되는 길이 결코 쉽지 않은데, 성경에서 보면 40년 광야 생활을 마치고, 유대 민족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제사장들이 법궤를 메고, 먼저 출발하잖아요. 넘쳐 흐르던 요단 강물이 그친 다음에 건너간 게 아니고, 법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넘쳐흐르는 요단강에 발을 담궜을 때 ,요단강이 그치고 안전하게 건너갔다는 이런 기록이 나오잖아요.
우리가 이 세계유산 만드는 길도 확실하게 된다는 보장이 있어서 가는 게 아니고, 법궤를 메고 요단강물에 먼저 발을 담그는 심정으로 이렇게 진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께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 기도하면서 묵묵히 갈 수 있도록 이렇게 기도해 주시고, 동참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진행자>네. 총장님 찬양 한 곡 소개해 달라고 했더니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를 청해 주셨어요. 좋아하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 서만철>예. 예수가 '우리를 부르는 소리 Softly and Tenderly Jesus is Calling ' 찬양은 아까 유관순 열사의 첫 스승이었던 사애리시 선교사께서 어려울 때마다 항상 불렀던 애창곡이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좀 요청을 했습니다.
◇ 진행자>우리 만나 가족들도 이 찬양을 따라 부르면서 그때 그 시절 사애리시 선교사님의 마음으로 한번 돌아가 봤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국내 선교 유적지 유네스코 등재 활동을 펼치고 있는 (사) 한국선교유적연구회 회장이자 전 공주대 총장이신 서만철 장로님과 함께 했습니다. 지금까지 최영실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