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TS 데뷔 싱글 <2 COOL 4 SKOOL>의 티저 사진. 빅히트 제공2014년 햇살이 따갑던 어느 여름날, 가족과 홍대거리를 거닐다 벽에 붙은 작은 포스터를 보았다. 스모키 화장을 한 채 얼굴을 잔뜩 찡그린 소년들.
"防彈少年團(방탄소년단)? 이 시대에 웬 왜색?" 낯설었다.
BTS 초기 로고. 빅히트 제공그렇게 스쳐간 그날 이후 3년이 흘렀다. 이슈와 기사에 파묻혀 지내던 2017년 5월 어느 날, 유튜브에서 한 영상을 보았다. 빌보드뮤직어워즈에서 싸이 이후 처음으로 상을 받은 한국 남자그룹 리더의 수상 소감이었다. 영어를 너무나 멋있게 잘했다.
"미국 교포인가봐?" 그런데 아내가 "일산 출신 토종"이란다. 아이돌그룹을 만들 때 해외 출신들이 공식처럼 들어가던터라 놀랐다. 게다가 7명 멤버 모두가 서울이 아닌 지방 출신이었다.
빌보드 무대에서 반짝반짝 빛나던 친구들은 3년 전 거리 포스터로 조우한 그 어설픈 일본풍 힙합전사들이었다. Rap Monster(RM)라는 특이한 이름의 리더는 아미(ARMY)라는 역시 특이한 이름의 팬들에게 "Love myself, love yourself"를 기억하라고 했다. '스스로를 사랑하자'는 소감 또한 독특했다.
몇달 뒤 이 그룹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한국 그룹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는 아메리칸뮤직어워즈(AMAs) 시상식 무대에서 'DNA'를 공연했다. 미국 TV 데뷔 무대를 현장에서, 또 안방에서 함께 한 아미들은 감격에 겨워 펑펑 울었다. 이를 기점으로 방탄소년단은 BTS가 됐고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시간은 또 흘러 2019년이 됐다. 국뽕에 잠시 취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던 50대 아저씨는 문화부장 직을 내려놓고 유튜버가 됐다. 유튜브가 대세가 되어가자 회사는 유튜브를 시험 삼아 '혼자서' 해보라고 했다. 콘텐츠를 놓고 며칠을 고민하던 중 BTS가 떠올랐다. 그렇게 본격 관찰이 시작됐다.
때마침 4월에 새 앨범 발매 기자회견이 열렸다. 직접 본 소년들은 진짜 놀라웠다. 기존의 편견이 단번에 박살났다. 음악을 대하는 자세, 삶과 사회를 보는 가치관, 인간에 대한 애정. RM은 "앨범을 통해 힘의 근원과 그늘, 나아가야 할 내일에 관해 말하고 싶었다"고 했다.
'얘들이 아이돌 맞나?' 연신 갸우뚱대며 밖으로 나왔다. 어찌 알았는지 100여 명의 아미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카메라를 조심스레 꺼내들자 피하기는커녕 찍어달라고 한다. BTS를 더 많이 알리고 싶어서란다. 15개국-확인된 곳만-에서 온 아미들은 '왜 BTS를 좋아하느냐'는 상투적 질문에 답했다. "BTS가 우리를 구해줬어요". 그날 아미 십수명의 요청으로 기념촬영을 해야만 했다. 단지 BTS 모국의 기자라는 이유로. 더 놀라버렸다.
편견과 차별에 맞서다, 세계의 정점에 서다
미국 CBS TV의 심야 인기 토크쇼 '더 레이트 쇼 위드 스티븐 콜베어(The Late Show With Stephen Colbert)에 출연한 BTS. 빅히트 제공한달 뒤 BTS는 미국 CBS의 인기 토크쇼 'The Late Show'에 출연했다. BBC는 그들을 '21세기 비틀스'로 불렀고, CBS는 1964년 비틀스의 미국 침공이 시작된 뉴욕의 에드 설리번 극장에서 BTS의 무대를 당시처럼 흑백으로 꾸몄다. BTS는 비틀스처럼 미국을 정복했고, 한국인들은 외국인을 보면 "Do you know BTS?"를 외치기 시작했다. 온라인의 최고 인기가수는 저스틴 비버에서 BTS로 넘어왔다. 빌보드 Social 50 차트 1위는 BTS가 4년간 독점하다가 결국 폐지됐다.
이러자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언론이 가만있지 않았다. 대한민국이라면 월드컵과 북핵 정도를 떠올리던 그들은, '인생을 바꾸어줬다'며 열정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동양 소년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도자기인형(Porcelain doll)", "공장에서 찍어냈다(Factory-made)", "목줄(Leash)을 매고 조련했다" 등 인종, 국적 등과 관련한 온갖 비하와 차별들이 온라인과 지면상에 쏟아졌다.
이에 BTS는 짧고 굵게 대답했다. "증명하겠다." 아미들 역시 이름처럼 전투를 벌였다. 그리고 승리했다.
2019년 MTV VMAs의 K팝 카테고리 신설에 항의해 전 세계 아미들이 온라인상에서 개최한 BTS MVAs. 자료사진2019년 MTV비디오뮤직어워즈(VMAs)는 BTS에게 본상을 주지 않기 위해 'Best Group'상을 폐지하고 미국 대중음악상 최초로 'Best K-pop상'을 신설했다. 아미들은 K팝을 격리하는 인종차별적 조치라고 강력하게 반발하면서 시상식 시청을 보이콧했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온라인상에서 BTS뮤직비디오어워즈를 열었다. 아미들은 "그들이 테이블에 앉혀주지 않는다면 우리가 따로 테이블을 차리면 된다"라고 맞받아쳤다. 놀란 MTV는 'Best Group'상을 되살려 BTS에게 4년 연속으로 줬다.
이후 BTS는 미국 4대 음악상의 주요 본상들을 석권했고, 코로나 기간이던 2021년 AMAs에서는 비영어권 가수 최초로 대상 격인 'Artist of the Year'를 거머쥐며 미국 대중음악 역사를 새로 썼다.
음악 차트도 휩쓸었다. 미국 최고 차트인 빌보드의 경우 200 앨범 차트는 2018년 <LOVE YOURSELF 轉 'Tear'>를 내면서 한국 가수 최초로 1위(총 6개 앨범)를 기록했지만, 미국 시장의 인기 척도인 HOT100 싱글 차트는 미답의 고지였다. 2020년 BTS는 고심 끝에 처음으로 영어 노래 'Dynamite'를 발표했고 한국 가수 최초로 정상을 차지했다. 이후 'Life Goes On'(한국어 노래 최초), Butter(10주 1위) 등 총 8곡(솔로 2곡 포함)을 정상에 올렸다. HOT100 1위를 차지한 한국 가수는 BTS뿐이다.
세상에 번진 전방위 BTS 현상
BTS와 아미들. 빅히트 제공BTS는 대중음악을 넘어 지구촌의 사회적 현상이 됐다. 전 세계 언론은 색안경을 벗고 BTS를 심도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각 대학에선 BTS현상을 연구했고 런던 등에선 학술대회도 열렸다. 'Love Yourself' 메시지는 세계인의 마음을 파고 들었고, 서구 중심 세계관에는 급격한 균열이 왔다.
대형 자본도 없이 작은 지하연습실에서 '피 땀 눈물'로 일어선 한국 아이돌의 서사를 만나, 지치고 외롭고 소외된 지구촌 아미들은 열광하고 감동하고 눈물 흘리고 함께 부조리한 세상에 맞섰다.
BTS는 K팝을 한국 산업의 주역으로 격상시켰다. BTS는 2018~2019년 월드투어에서 193만장의 티켓을 팔았고 3360억원을 벌었다. BTS가 음반과 굿즈, 콘서트, 관광 등을 통해 국가경제에 미치는 경제효과를 한국은행은 연간 6.8조원으로 추산했다. 외국인은 80만명이 오고 수출은 1.5조원 늘어난다고 한다. 서울에서 콘서트를 열면 1조원이 벌린다.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BTS는 2022년 말 석진을 시작으로 군 복무에 들어갔다. 하지만 그들은 시간을 버리지 않고 솔로 앨범을 발표하고 빌보드 HOT100 1위를 차지하고 월드투어를 하는 등 군 입대 전날까지도 바쁜 일정을 소화했다. 심지어 기다리는 팬들을 위해 군백기(병역 공백기)동안에 공개할 앨범과 방송 콘텐츠까지 미리 만들어놓는 믿어지지 않는 계획을 실행했다.
키가 크면 그림자도 길다
지난해 8월 한 방송사가 슈가의 음주운전 모습이라고 공개한 CCTV 영상. 그러나 이후 해당 영상은 슈가와 무관한 것으로 확인돼 방송사는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 방송을 했다. 자료사진BTS가 자리를 비우자 소속사인 하이브는 어도어 민희진 전 대표와 경영권 관련 분쟁에 휩싸인다. 지난해 4월 민 전 대표의 전무후무한 욕설 기자회견으로 총성을 울린 갈등은 BTS에게로 불똥이 튀었다. 그러던 중 슈가의 음주운전 사건이 터졌고 민 전 대표 지지 세력과 BTS 안티 세력은 십자포화를 쏟아부었다. BTS 초기에 트위터와 커뮤니티 등에서 익명에 기대어 가해졌던 폭력과 증오를 직접 목격하고 말못할 충격을 받았다.
더 경악한 일은 한국 언론이 보여준 광기다. 기사의 주요 소비 채널이 지면, 방송에서 온라인으로 옮겨간 뒤 조회수에 눈이 먼 하이에나가 된 것일까? 인터넷매체는 물론 전통 언론까지 경쟁적으로 오보를 쏟아냈다. 가짜 뉴스와 왜곡, 급기야는 가짜 CCTV 영상까지 버젓이 보도했다. 언론인의 사명감과 윤리는 어디로 간 걸까? 조작과 선동이 한국 언론판을 휘감았다. 취재와 검증은 없었다. 사실 여부에는 관심 없었다. 오로지 '슈가 죽이기'에 혈안이 돼있었다. 본인이 수차례 사과하고 반성하고, 포토라인에 서서도 사과를 했건만 그토록 정의로운 한국 언론에는 자비가 없었다. '단두대'라는 표현까지 나왔다.
아미들은 격분했다. 악에 받쳐서 언론 대신 팩트를 체크하고 진실을 알렸다. 결국 해당 영상은 오보였던 것이 확인됐고 방송사는 영상을 삭제하고 사과했다. 그래도 언론과 안티 세력의 공세는 그치지 않았다. BTS를 낳아줘서 고맙다며 한국을 사랑하고 찾았던 외국 아미들은 한국 언론에 분노하고 한국 사회에 실망했다. 후유증은 너무나도 컸다.
그들의 선한 영향력
BTS 슈가가 자폐스텍트럼장애 음악 보조치료 봉사를 하며 어린이들과 대화하고 있다. 세브란스병원 유튜브 캡처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슈가는 지난 21일 마지막으로 병역을 마쳤다. 다른 멤버들과는 달리 팬들에게 사과 편지만 전한 그에게 일부 언론은 '자숙은 없었다', '자숙 아닌 자숙'이라며 다시 날을 세웠다. 걱정하던 아미들은 이틀 뒤 나온 뉴스에 울고 말았다. 슈가가 자폐스펙트럼장애를 가진 아이들을 위해 세브란스병원에 50억원을 기부한다는 소식이었다. 자신의 이름을 내건 '민윤기 치료센터'를 건립해 앞으로도 계속 돕겠다는 의지를 내보였다. 그는 수개월동안 주말을 이용해 병원을 찾아 아이들에게 악기를 가르치며 보조치료자로 봉사하고, 의료진과 함께 음악 치료 프로그램 개발에도 참여했다. 아이들은 BTS 멤버임을 알리지 않은 그를 "민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따랐다.
슈가는 세상의 무자비한 돌팔매질을 견뎌내면서 먼훗날 하고자 했던 자선사업가의 길을 앞당기기로 했다. 청소년기의 자신처럼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을 위해 심리치료사 자격증을 따겠다고 했던 그는 말이 아닌 행동으로 반성하고 사죄했다. 이에 아미들은 슈가를 따라 세브란스병원 후원에 동참하고 있다. 24일 하루에만 2억원이 모였다.
'선한 영향력'이란 말은 오래 전부터 쓰였지만 대중에게 익숙해진 데는 BTS의 영향이 컸다. BTS 멤버들은 틈나는대로 기부했다. 누적액이 200억 원에 이른다. 전 세계 아미들은 이를 좇아 재해 복구 지원금을 내고 쌀을 보내고 희귀식물 보존에 나서고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고 다리를 놓아준다. 미술 교육과 문화재 복원 등을 지원하는 미술 애호가 RM을 따라 미술관 투어를 가고 그림을 산다. RM은 자신이 수집한 미술 작품들을 함께 즐기기 위해 박물관을 만들겠다고 했다. 한국 미술계는 RM에 공개적으로 감사를 표시하고 있다.
2022년 6월 미국 백악관에서 BTS가 바이든 전 미국 대통령과 대화하고 있다. 바이든 전 대통령 트위터 캡처BTS는 또, UNICEF 등과 협력해 'LOVE MYSELF' 등 캠페인을 진행하고 UN에서 명연설을 했다. 미국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해 아시아인 증오 범죄 근절에 힘을 보탰다.
또다시 생각이 든다. '정말 아이돌 맞나?'
"두렵던 사막은 우리의 피, 땀, 눈물로 채워 바다가 됐어"라는 그들의 말. 무려 7년이나 '처음 보는 놀라운' 일들을 목도하며 60을 바라보게 된 아저씨는 이제 수긍한다. 주파수 52 '낯선' 방탄소년단에 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