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 앞에서 국가폭력피해범국민연대와 제주4·3범국민위원회 회원들이 제주 4·3사건 당시 강경진압을 주도한 고(故) 박진경 대령이 국가유공자로 등록된 것을 규탄하며 등록 취소를 촉구하고 있다. 연합뉴스이재명 대통령이 제주 4·3 유혈진압 책임자인 고 박진경 대령의 국가유공자 등록 취소 검토를 지시했지만 기술적 문제로 인해 실현 가능성은 예상하기 어렵게 됐다.
국가유공자 등록을 취소하려면 먼저 그 근거가 되는 무공수훈이 허위·날조 등의 이유로 취소돼야 하지만, 현재 파악된 바로는 전공 기록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국방부 관계자는 15일 박 대령의 을지무공훈장 수훈과 관련해 "전시에 이뤄진 일이다 보니 훈장이 수여된 기록만 남아있고 전공 확인서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4·3 유혈진압에 대한 구체적 증언과 분노가 분출하고 있지만, 막상 박 대령의 전공 기록을 찾지 못한다면 수훈 취소도 유지도 하기 어려운 애매한 상황이 된다.
다만 전쟁 중의 혼란상을 감안하더라도 여러 합리적 의문점은 제기된다. 그는 6·25 전쟁 중인 1950년 12월 을지무공훈장을 받았다. 1948년 6월 부하들에 의해 암살된 지 2년 반쯤 지나서다.
1950년 12월은 국군과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10월에 평양을 점령하고 압록강까지 북진했다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에 밀려 흥남철수 등을 통해 후퇴하는 시점이었다.
전쟁 초기 만큼의 긴박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전황은 크게 악화돼 있었다. 고인이 6·25 전쟁과 직접 관련이 없었음에도 이런 시점에 갑자기, 그것도 사후 2년여 뒤 훈장이 수여됐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대목이다.
일각에선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년 8월 15일) 이전의 '무공'은 구체적 내용 여하를 떠나 상훈법상 무공훈장 수훈 대상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설령 1950년 12월 전황이 사후 수훈을 진행할 만큼 안정돼있었다고 해도 문제는 남는다. 그런 상황에서 수훈 기록만 존재할 뿐 이를 뒷받침할 공적 기록은 사라졌다는 것은 우연적 요소가 강하기 때문이다.
국방부는 전체 무공훈장 수훈자 가운데 전공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사례에 대해 15일 현재 구체적 답변을 하지 않았다. 박 대령의 경우가 일반적인지, 예외적인 것인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적일 수밖에 없다.
이번 논란은 박 대령 유족이 지난 10월 무공수훈을 근거로 낸 국가유공자 등록 신청을 국가보훈부가 승인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며 시작됐다. 이 대통령은 14일 보훈부에 등록 취소 검토를 지시했다.
박 대령은 1948년 5월 제주 주둔 9연대장으로 부임한 뒤 도민에 대한 유혈진압을 지시함으로써 4·3단체들로부터 양민 학살 책임자라는 비판을 받아왔다. 그는 그해 6월 강경 작전에 반발한 부하들에 의해 암살됐다.
보훈부는 이번 사안에 대해 "무공훈장 재검토 등을 위한 관계기관 협의 및 관련 법령과 절차 등을 면밀히 검토해 조치하겠다"고 밝혔고, 아울러 논란의 재발 방지를 위한 법 개정 등 개선방안을 추진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