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올해가 산재 사망 근절 원년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7월 국무회의에서 이재명 대통령은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산업재해 사망 사고가 잇따른 포스코이앤씨에 대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비판하고, 김영훈 고용노동부 장관에게 "상당 기간 지나도 산재가 안 줄어 들면 직을 걸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지난달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2025년 3분기 산업재해 현황 부가 통계(이하 부가 통계)'를 보면 올해 9월까지 산재 사망자는 지난해 443명보다 늘어났다.
특히 '산재와의 전쟁'의 주요 패전지는 대구·경북인 것으로 나타났다.
고용노동부의 부가 통계를 보면 전국 6개 노동청 가운데 산재 사망자 증가율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대구지방고용노동청이다. 대구·경북 지역 산업재해 사망자는 1분기부터 3분기까지 총 6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39명에 비해 무려 74%나 증가했다.
이로 인해 10월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당시 권병희 대구지방고용노동청장에게 "지방노동청의 존재 이유가 무엇이냐"는 날선 공세가 이어지기도 했다.
23일 오전 대구 중구 사일동 주상복합 아파트 공사 현장. 지난 4월 이곳에서 60대 하청업체 소속 노동자가 추락해 숨졌다. 곽재화 기자지난 4월 21일 오전 10시 58분쯤 대구 중구 사일동 포스코이앤씨 주상복합 아파트 신축 공사 현장.
'낙하물 방지망'을 설치하던 60대 하청업체 소속 작업자가 28층 높이에서 아래로 추락해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숨졌다.
노동당국에 따르면 당시 작업자는 충분한 안전 조치 없이 작업을 수행하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대구경찰청은 업무상 과실치사와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 등으로 원청인 포스코이앤씨와 하청업체에 대한 수사를 진행 중이다. 대구지방고용노동청 역시 원청과 하청의 경영 책임자와 안전 책임자를 상대로 수사에 나섰다.
추락은 공사 현장의 대표적인 산재 원인이다. A씨 외에도 수많은 건설 현장 노동자들이 추락으로 목숨을 잃고 있다.
대구고용노동청에 따르면 지난 1월부터 8월까지 대구·경북 건설 현장 산재 사망자 총 28명 가운데 21명이 추락사한 것으로 나타났다.
노동당국이 지난 9월 실시한 대구·경북 건설현장 불시 점검에서는 안전 난간 및 안전대 걸이 시설 설치 미흡, 개구부 덮개 미고정 등 다양한 추락 사고 위험 요인이 다수 확인되기도 했다.
건설노조 대경건설지부 심재선 조직부장은 "안전하게 공사하는 방법이 다 있지만 현장에서는 공기 단축을 해야 한다는 압박이 강하다 보니, 관리 감독을 철저히 하는 대신 얼른 일을 해치우자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산업재해는 사기업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통령이 포스코이앤씨에 대해 '면허 취소' 옵션까지 언급하며 비판한 지 2주도 지나지 않아, 한국철도공사(코레일)에서도 '안전 불감증'으로 대형 참사가 벌어졌다.
지난 8월 19일 오전 경북 청도군 화양읍 경부선 철로에서 무궁화호 1903호 열차가 비탈면 안전 조치를 위해 선로를 따라 이동 중이던 코레일 소속 직원 1명과 하청업체 직원 6명을 들이받았다.
당시 작업자들은 기차가 오는 방향을 등진 채 선로 부근을 따라 걷던 중, 등 뒤에서 달려오는 무궁화호 열차에 치인 것으로 조사됐다.
코레일의 안전 불감증은 다방면에서 지적됐다.
정부 합동 감식 결과에서는 선로 옆길인 노반이 좁아 작업자가 열차와 부딪칠 위험이 컸음에도 코레일이 상례 작업(열차를 차단하지 않고 실시하는 유지보수 작업)을 진행시킨 점이 지적됐다.
아울러 당시 하청업체 직원 6명 가운데 2명이 업체가 작성한 작업계획서의 명단에 있는 인물과 다른 사람인 것으로 드러나는 등 서류 관리 미비가 도마에 올랐다.
한편 철도노조는 코레일이 사고 예방 기능을 하는 열차 접근 경보 어플리케이션의 오류를 알고 있었음에도 신속히 개선하지 않았고, 2019년 밀양역 인근에서 '상례 작업'으로 사상 사고가 있었지만 사측이 상례 작업을 유지했다고 비판했다.
경북경찰청은 코레일 대구본부장 등 7명에 대해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로 입건했고, 이 가운데 코레일 용역 설계 담당자, 하청업체 작업 책임자, 철도 운행 안전관리자 등 3명을 구속했다.
대구지방고용노동청은 사고 직후 대구본부 관내 선로에 대해 작업 중지 명령을 내리는 한편, 사임한 한문희 전 코레일 사장 등에 대해 중대재해처벌법,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혐의로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연합뉴스특히 산재 사망사고는 하청업체 직원과 같은 '노동 약자'에게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 경북 경주시 안강읍 두류공단의 아연 가공업체에서 수조 내 배관 공사를 하던 외주업체 소속 작업자 4명이 질식해 작업자 4명의 사상자가 발생했고, 지난달 포스코 포항제철소 STS 제강공장에서 슬러지 청소를 하던 용역업체 직원 2명이 사망하고 포스코 직원 4명이 다쳤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두 사건 모두 원청이 아니라 하청업체 직원들이 사망했다. 원청이 하도급으로 업무는 주면서, 하청의 위험 관리는 되지 않는 점이 구조적 원인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최명기 대한민국산업현장교수단 교수는 "건설이 됐든, 제조가 됐든 사망한 사람 중에 원청 직원은 없다"면서 "영세 현장에서는 안전 발판이나 사다리 등을 비용 절감을 위해 부실한 제품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고, 불법 하도급을 주면서 이윤 착취가 벌어지며 사고가 난다"고 말했다.
또 다른 '노동 약자'인 이주노동자들은 폭염 속에 잇따라 목숨을 잃기도 했다.
지난 7월에는 경북 구미시 산동읍 아파트 공사현장에서 베트남 이주노동자인 20대 남성 A씨가 숨진 채 발견됐고, 8월에는 경북 포항시 북구 야산에서 벌초 작업을 하던 네팔 이주노동자 40대 남성 B씨가 벌목 작업 중 쓰러져 헬기로 후송됐지만 사망했다.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김동은 진료사업국장은 "언어 장벽 때문에 온열질환 등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고, 이주노동자가 근로시간이 상대적으로 긴 만큼 온열질환에 더욱 취약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노동 약자들의 산재 사망 사고를 줄이기 위해서는 산업 재해 법규의 예방적 성격을 강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중대재해 발생 기업에 대한 처벌도 중요하지만 '예방' 중심의 산업 안전 정책을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 안전공학과 교수는 "중대재해처벌법도 결국 산재 예방이 목적 아니냐. 그런데 한국은 산재 예방을 위한 계도, 안내, 홍보는 굉장히 부실하다가 사고 나면 기업을 강력히 처벌하는 '처벌 일변도' 정책을 쓴다"면서 "영국 등 산재 예방 선진국처럼 예방 의무 주체가 누구인지 등 법제를 실효성 있게 마련해 놓고, 기업을 상대로 널리 홍보하고 계도하는 데 집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