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체스(오른쪽)이 2일 '웰컴저축은행 PBA 챔피언십' 남자부 결승 뒤 정상에 오른 응우옌을 축하하고 있다. PBA 비록 3회 연속 우승을 놓쳤지만 당구 전설의 품격을 입증했다. 다니엘 산체스(웰컴저축은행)가 정상 등극 문턱에서 자신의 파울을 스스로 인정하는 스포츠맨십을 발휘하며 찜찜한 승자 대신 '위대한 패자'가 됐다.
산체스는 2일 경기도 '고양 킨텍스 PBA 스타디움'에서 열린 2025-26시즌 9차 투어 '웰컴저축은행 PBA 챔피언십' 남자부 결승전에서 '베트남 강호' 응우옌꾸옥응우옌(하나카드)에 석패했다. 풀 세트 접전을 펼쳤지만 3-4로 우승컵을 내줬다.
이날 산체스는 1, 2세트를 따내며 앞서갔다. 응우옌도 3, 4세트에서 이기며 치열한 경쟁이 벌어졌다. 산체스가 5세트를 15-4로 따내자 응우옌도 15-2로 6세트를 마무리하며 승부는 마지막 7세트로 이어졌다.
산체스는 선공으로 초구에 4점을 몰아쳤다. 어려운 배치에서 밀어서 비껴치기에 성공하고, 옆돌리기를 구사하는 등 절정의 감각을 자랑했다. 이후 산체스는 뒤돌리기로 5점 하이 런을 만들며 승기를 잡는 듯했다.
하지만 산체스는 갑자기 심판에게 확인을 요청했다. 심판이 비디오 판독을 통해 무언가를 확인하더니 득점이 취소되고 공격권이 응우옌에게 넘어갔다. 알고 보니 산체스는 예비 스트로크 과정에서 큐와 수구가 접촉해 스스로 파울을 인정한 것이었다.
경기장의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고, 선수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산체스는 파울을 먼저 심판에 알렸고, 5점 하이 런 대신 4점으로 인정이 됐다.
이후 반전이 일어났다. 응우옌은 곧바로 3점을 따내며 만회했고, 서로 공타를 주고 받은 뒤 3이닝째 뱅크 샷 1개를 포함해 무려 8점을 쏟아부으며 경기를 끝냈다. 마지막 뒤돌리기에 성공한 응우옌은 두 손으로 큐를 번쩍 들어 포효했다. 이후 산체스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했고, 스페인 전설은 응우옌을 안아주며 PBA 첫 우승을 축하해줬다.
신중하게 샷을 구사하는 산체스. PBA 마지막 7세트는 15점이 아닌 11점으로 초반 기세 싸움이 절대적이다. 산체스가 만약 파울 없이 5점을 냈다면 승부가 달라질 수 있었다. 이후 공 배치도 나쁘지 않아 산체스는 득점 행진을 더 이어갈 확률이 높았다. 경우에 따라 퍼펙트 큐로 우승을 확정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산체스는 정정당당한 선택을 했다. 비록 PBA 남자부 2번째 3회 연속 우승은 놓쳤지만 훈훈한 장면을 만들며 전설의 품격을 스스로 높였다.
경기 후 산체스는 당시 상황에 대해 "예비 스트로크 때 수구와 가깝게 큐를 맞댔는데 공이 미세하게 움직였다"면서 "공을 치는 선수가 아닌 이상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고 돌아봤다. 이어 "그렇지만 큐가 공에 닿는 게 느껴졌고, 이 사실을 알리지 않으면 잠에 들기 전에 생각이 날 것 같았다"면서 "파울로 이득을 취하고 싶지 않았기에 심판에게 해당 사실을 알렸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응우옌도 산체스의 용기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응우옌은 "산체스가 왜 최고의 3쿠션 선수인지 다시 느끼게 됐다"면서 "경기 도중 본인이 범한 파울을 심판에게 스스로 먼저 얘기한 것을 보며 산체스를 다시 한 번 우러러 보게 됐다"고 찬사를 보냈다.
위대한 준우승자 산체스와 PBA 장상진 부총재. PBA 산체스는 PBA 이전 세계선수권 4회, 월드컵 15회 우승을 달성하며 스페인 3쿠션 전설로 추앙을 받았다. '황제' 토브욘 브롬달(스웨덴)과 PBA를 먼저 정복한 프레드릭 쿠드롱(벨기에), '인간 줄자' 딕 야스퍼스(네덜란드)와 함께 세계 3쿠션 '4대 천왕'으로 군림했다.
PBA에는 2023-24시즌 합류했는데 산체스는 초반 9개 대회에서는 32강이 최고 성적을 만큼 부진했다. 그러나 세트제와 뱅크 샷 2점제 등 낯선 PBA 환경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산체스는 지난 시즌 3차이자 PBA 첫 해외 투어인 '에스와이 바자르 하노이 오픈'에서 첫 정상에 올랐다.
그러더니 산체스는 올 시즌 랭킹 1위로 마침내 PBA까지 정복할 태세다. 9개 투어 중 5번 결승에 올라 2회 우승과 준우승 3회로 상금 랭킹 1위(3억1500만 원)를 지켰다. 팀 리그에서도 웰컴저축은행의 플레이오프(PO) 직행을 이끌면서 "산체스가 돌아왔다"는 찬사를 받고 있다.
기자 회견에 나선 산체스. PBA
하지만 정작 본인은 "많은 사람들이 '산체스가 돌아왔다'고 하는데, 나는 한번도 떠난 적이 없다"며 웃음을 자아냈다. 산체스는 "조재호(NH농협카드), 강동궁(SK렌터카), 다비드 사파타(스페인·우리금융캐피탈) 모두 떠난 적이 없다"면서 "모든 선수들이 그들의 당구를 묵묵히 하고 있는데 토너먼트 방식의 대회에선 1명의 우승자만 나올 뿐이고, 많은 사람들은 우승자만 기억한다"는 명언을 남겼다.
산체스는 또 "이번 시즌에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아직도 적응할 것들이 많다"면서 "화려한 조명, 공연들이 아직도 어색하게도 느껴지는데 더 적응해야 하고 발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는 3월 상위 32명만 나서는 왕중왕전인 SK렌터카 월드 챔피언십에 대해 "이미 최고의 시즌을 보내고 있지만 결승전 패배는 역시 마음이 아프다"면서 "월드 챔피언십에서도 좋은 성적을 거둬 최고의 시즌을 만들고 싶은 열망이 크다"고 각오를 다졌다.
세계캐롬연맹 3쿠션에 이어 PBA까지 주름잡고 있는 산체스. 본인의 품격은 물론 당구 종목의 신사다운 면모까지 부각시킨 진정한 전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