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8일 당시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였던 이재명 대통령(오른쪽)과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왼쪽)이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경제5단체 간담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국회사진취재단상속세 때문에 고액자산가가 유출되고 있다는 대한상공회의소의 보도자료가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이재명 대통령과 경제부총리, 산업부장관이 잇따라 '고의적 가짜뉴스'를 개탄하며 엄중 대응을 예고했다.
국내 상공업계를 대표하는 대한상의가 근거가 미약한 데이터를 토대로 정부 정책에 반하는 의견을 개진한 것은 국민을 속이는 일이다. 특히 연구.조사 전문기구인 조사본부를 산하에 두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고의성'을 강하게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재명 대통령은 7일 한국의 자산가 국외 탈출이 급증했다는 대한상의의 지난 3일 보도자료와 관련, "법률에 의한 공식 단체인 대한상공회의소가 이런 짓을 공개적으로 벌이다니 믿어지지 않는다"며 "사익 도모와 정부정책 공격을 위해 가짜뉴스를 생산해 유포하는 행위는 지탄받아 마땅하다"고 밝혔다. "주권자인 국민의 판단을 흐리려는 고의적 가짜뉴스는 민주주의의 적"이라고도 했다.
구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8일 "부유층 2400명이 상속세 부담으로 한국을 떠난다는 것은 가짜뉴스"라며 "제대로 안 된 통계를 활용해 보도자료를 생산.배포한 대한상의는 응당의 책임을 져야 한다"고 강조했고, 앞서 김정관 산업통상부 장관은 지난 7일 "사실 검증 없는 정보가 악의적으로 확산된 점에서 이는 명백한 가짜뉴스에 해당한다. 강한 유감을 넘어 단호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최태원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류영주 기자대한상의는 지난 3일 '상속세수 전망 분석 및 납부 방식 다양화 효과 연구' 보도자료를 낸 바 있다. 상의의 보도자료는 영국의 이민 컨설팅사인 '헨리 앤 파트너스'의 자료를 인용했는데, 지난해 한국을 떠난 고액 자산가가 2천400명으로 전년 대비 2배 증가했고 세계에서 4번째로 많다는 내용이 골자다. 강석구 대한상의 조사본부장은 "높은 상속세 부담" 때문에 부작용이 커지고 있다며 정책 변화를 촉구했다.
논란이 커지자 대한상의가 사과문을 내기는 했지만 많은 언론이 이미 이 자료를 근거로 고액자산가의 해외 이탈을 보도했다는 점에서, 만일 논란이 없었다면 슬며시 묻힐 뻔한 가짜뉴스였다.
대한상의 보도자료 사태는 여러 가지 면에서 허점과 의문이 남는다.
우선 대한상의가 인용한 보고서는 영국의 이민·투자 컨설팅업체인 '핸리 앤 파트너스'가 지난해 내놓은 '백만장자들의 이민보고서'로, 2400명이란 수치는 실제 통계 자료가 아닌 지난해 6월 업체에서 추정한 2025년 전망치였다.
해외 조세정책 분석기관인 TPA(Tax Policy Associates)는 이미 지난해 7월 27일 해당업체의 조사방식이 부실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했고, 영국 유력 경제지 파이낸셜타임스도 비슷한 시기에 문제점을 널리 알렸다.
핸리 앤 파트너스 보고서의 데이터를 분석한 곳은 남아프리카 소재 1인 기업인 '뉴 월드 웰스'라는 점도 자료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린다. 또 기존에 들어있던 '부동산' 지표가 2025년도 '개인자산' 정의에는 빠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전세계 고액 자산가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 수치도 허술하기 이를데 없다.
TPA는 이런 사실 등을 근거로 "핸리앤파트너스 보고서가 조작된게 아니냐?(Are Henley & Partners' millionaire‑migration reports fabricated?)"며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TPA는 이런 사실 등을 근거로 "핸리앤파트너스 보고서가 조작된게 아니냐?(Are Henley & Partners' millionaire‑migration reports fabricated?)"며 신뢰성에 의문을 제기했다. TPA 캡처특히 핸리 앤 파트너스 보고서에 한국의 고액자산가 유출이 '상속세' 때문이라는 표현은 전혀 없었다. 단지 "한국이 경제적, 정치적 혼란기를 거치면서 2025년 고액자산가 순유출이 크게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언급이 있을 뿐이다.
대한상의가 기업인들의 이익을 위해 해외자료를 거짓으로 가공해 상속세에 꿰맞춘 뒤 여론조작에 활용했다면 범죄행위나 다름없다. "책임있는 기관인 만큼 면밀히 데이터를 챙겼어야 했다"는 변명이나 떠넘기기로 모면할 일이 아니다.
조사본부인가 조작본부인가
대한상의는 조사와 연구, 정책건의를 대표적인 기능으로 삼는 기관이다. 산하에는 거대한 조사본부를 두고 있다. 그런 기관의 조사본부가 고액자산가의 국외 이탈과 상속세와의 상관관계를 조사해 보도자료를 작성하면서 '핸리 앤 파트너스 보고서'를 주요 근거로 인용했다면, 조세정책 분석기관인 TPA나 해외 유력지의 문제제기를 놓칠 리 없다고 보는 게 상식적이다.
고의적인 가짜뉴스가 국민의 눈과 귀를 흐리는 민주주의의 적인 것처럼, 가짜 보도자료도 마찬가지다. 왜곡된 정보 제공은 국정 방해 행위이자 대국민 사기에 해당한다. 1차적으로 언론이 정보를 철저히 걸러야 하겠지만 정부도 비슷한 사례의 재발을 막기 위해 보도자료 작성경위 등 사실관계 전반을 철저히 밝히고 법적·제도적 대응에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