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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장준하 선생 장남, "박근혜 후보가 입장 표명해야"

정치 일반

    故 장준하 선생 장남, "박근혜 후보가 입장 표명해야"

    - 테러로 턱뼈가 8조각으로 부서지기도
    - 개인 아닌 대선 후보로서 박근혜 후보가 입장 표명해야
    - 현 정부에서 진상규명 기대 안 해
    - 용서 구하지 않고 기득권 누리려는 것이 정말 용서 안 돼

    인터뷰를 인용보도할 때는 프로그램명 ''CBS라디오 <김미화의 여러분="">''을 정확히 밝혀 주시기 바랍니다. 저작권은 CBS에 있습니다.

    ■ 방송 : FM 98.1 (14:05~15:55)
    ■ 진행 : 김미화
    ■ 게스트 : 장호권 (故 장준하 선생 장남)

    <<1부) 여러분이 만난 사람>>

    ◇ 김미화> 75년 의문사한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한 재조사 문제가 논란입니다. 이장 과정에서 선명하게 드러난 두개골 함몰 흔적 때문인데요. 장준하 기념 사업회와 유족들은 청와대에 재조사 요청서를 전달했죠. 고 장준하 선생임의 장남이신 장호권 선생 초대했습니다. 안녕하세요.

    ◆ 장호권> 네, 안녕하세요. 오랜만입니다.

    ◇ 김미화> 요즘 얼마나 섭섭하세요?

    ◆ 장호권> 속상한 건...

    ◇ 김미화> 이미 지났나요?

    ◆ 장호권> 제가 37년 동안 속상한 거를 가슴에 품고 참고 살아왔는데 이번에 그것이 다시 머리 끝까지 치솟는 걸 참느라 많이 애를 쓰고 있어요.

    ◇ 김미화> 이번에 개묘를 하고 시신에 골절 발견한 게 우연히 묘가 무너져서 시작된 일이라고요?

    故 장준하 선생 유족

     

    ◆ 장호권> 네. 그것 때문에 사람들이 말이 많은데. 작년 7월에 비가 많이 내려서 파주 광탄면에 있는 장 선생님의 묘가 붕괴가 됐어요. 그래서 이장을 하기로 해서 준비하는 과정에 그해 8월 17일날 추도식 때 파주 시장이 참석했다가 장 선생님이 현충원으로 가는 것보다 자기들이 모시는 게 좋다고 해서 시작된 작업으로 파주시에서 장 선생님 추모공원과 묘역을 준비했죠. 이장을 위해 개묘를 하는 김에 과거에 못했던 시신 유골을 제대로 검사해보자 해서 법의학자를 대동해서 관을 열었더니 유골이 보존돼 있었어요. 그걸 옮기는 과정에서 예상했던 것보다 성명한 상흔을 발견하게 되서 급진전하게 됐죠. 이건 타살이 맞다. 물론 법의학자의 소견으로는 타살이라는 책임 있는 말은 못하지만 일반적으로 사고로 추락해 만들어진 상처라기엔 상당히 이례적이다. 딱 그만한 크기가 귀를 피해서 뒤통수를 쳐야 그런 상처가 될 수있는 확률이 낮은 상처다. 이 말은 인위적인 가해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라는 쪽에 무게를 갖게 되는 거죠.

    ◇ 김미화> 민주당에서 19년 전 보고서를 공개했던데, 의문의 주사 흔적 얘기를 해요. 당시에도 논란이 있었죠? 팔하고 둔부에 있었나요?

    ◆ 장호권> 아니요. 조금 잘못... 의문사 진상한다고 민주당에서 발표를 했는데. 그 당시 장 선생님 시신에서는 머리 뒤에 약간 피 흘린 흔적하고 오른쪽 둔부 위쪽에 두 개의 주사바늘 자국, 양쪽 팔 안 쪽 겨드랑이에 피멍. 그것밖에 없었어요.

    ◇ 김미화> 아버님의 주검이 타살이라고 확신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 장호권> 처음에는 의심은 했죠. 타살보다는 당했구나. 시신을 집에다가 모시고 염하는 분들이 모시는 과정에서 이것이 무슨 추락사냐. 보통 추락했다면 시신이 많이 훼손이 됐을텐데 이건 추락해서 생긴 상처는 하나도 없다. 이 말과 저희가 당했구나 하는 생각하는 것과 맞물려 타살이라는 확정을 했죠.

    ◇ 김미화> 그 때 당시 몇 세 였어요?

    ◆ 장호권> 제가 27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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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미화> 당시 아버지는 왜 산에 가셨어요? 추락을 본 증인도 나왔다는 얘기도 있는데.

    ◆ 장호권> 네.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발족돼서 두 번에 걸쳐 조사를 했어요. 그때도 목격자라는 사람을 불러다가 조사를 했죠. 처음 장 선생님이 돌아가셨을 때 저희가 목격자를 모셔서 진술을 녹음했습니다. 그때 진술과 나중에 진상규명위원회에서의 진술이 상당히 차이가 있었죠. 저희는 이렇게 보고 있습니다. 다음에 조사 규명 할 때 목격자라는 사람이 중앙정보부 관계자가 직접 고백하기를 정보부 끄나풀이었다.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중요한 실수는 진술 과정에서 상당한 시간 차가 난다는 거죠. 자기가 떨어지는 걸 목격하고 인공호흡을 하고 다시 내려와서 산행하던 사람들에게 사고를 알리고 몰려와서

    장 선생님을 봤을 때 걸린 시간이 약 한 시간 반 정도밖에 안 되요. 그런데 저희가 그 길을 똑같이 전부 다 해보니까 2시간 반에서 3시간이 걸리더라고요. 그리고 저희 돌아가셨다는 시간이 오후 1시경인데 그 당시엔 핸드폰도 없는 시절에 그 산 속에서 사건이 벌어지고 저희 어머니는 2시 좀 지나서 전화를 받습니다. 장 선생님이 사고를 당했다고.

    ◇ 김미화> 어디서요?

    ◆ 장호권> 모릅니다. 어디서 전화 왔는지. 기관에서 전화 온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렇다면 2시경에 장 선생님 부인이 장 선생 사고사를 당한 걸 포천에서 일어난 일을 어떻게 알게 됐느냐. 또 한편 이동파출소에서는 의정부도경으로부터 사고 소식을 받게 됩니다. 그러면 어떤 핸드폰도 없고 연락망도 없는 상황에서 산 속 상황에서 일어난 사건을 파출소에다가 연락을 해주느냐. 추리를 해보면 이미 각본대로 하고 상황이 끝났다는 걸 무전기로 쭉쭉 연락을 해서 그렇게 빨리 알린 것 아니냐.

    ◇ 김미화> 당시에 사건 조사를 한 적이 있나요?

    ◆ 장호권> 네. 사고 나서 장 선생님 장례 차르고 나서 등반 전문가들과 전부 모여서 7차례 걸쳐서 현장에 가서 똑같이 목격자가 얘기 했던 길을 전부 다녔습니다.

    ◇ 김미화> 당시 보고서 같은 거, 적은 문서가 있나요?

    ◆ 장호권> 그것을 진상규명위원회에 다 드렸죠. 거기서도 이건 심증은 가는데 시신을 보지 않고, 목격자가 그렇다고 하니 장 선생님 의문사은 밝혀내기 불능이다. 이렇게 결론을 내렸던 거죠.

    ◇ 김미화> 어떤 분들은 왜 사건 당시에 문제제기를 못했는가, 그 땐 분위기가 어땠나요? 왜 못했나요?

    [BestNocut_R]◆ 장호권> 거기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박정희가 영구집권, 종신집권을 위해 유신을 만들었어요. 초헌법적이죠. 그 유신헌법을 ''지 마음대로 법''이라고 저는 하는데. 장 선생님이 그것을 철폐시키기 위해서 백만 인 서명 같은 걸 했었습니다만. 그 당시에는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학생세력, 산업현장에서 시위하다가 고문당하거나 해서 죽은 이름 없는 민주화 투사들. 그 분들이 장례식장에서 관계 기관에게 시신을 빼앗겨서 지 들 마음대로 임의로 화장을 해서 뼛가루만 주는 사례가 많았습니다. 장 선생님도 예외가 아니고. 저희가 걱정하는 게 공식기관에 부검하거나 사인을 밝혀달라고 의뢰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그런 우려가 많이 있었죠. 그래서 제대로 조사를 못했죠.

    ◇ 김미화> 장호권 선생께서도 테러 위협을 겪었다고요?

    ◆ 장호권> 아버님이 그렇게 당한 1년 후 4월 19일. 4.19죠. 그 당시에 전 경찰에 비상이 내려졌는데 그날 낮에 제가 모처 기관하고 약간 언쟁이 있다가 들어왔습니다. 아버님 사인을 밝히기 위함이었습니다. 저녁에 집에 들어오는데 4명이 집앞 골목에 서 있다가 내 이름을 물어봐서 그렇다 했더니 너무 까불고 다닌다 하면서 제가 테러를 당하게 됩니다.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기어 들어가보니까 도저히 통증 때문에 참을 수가 없어서 실려서 경희의원으로 갔습니다. 제 턱뼈가 8조각으로 부서졌죠. 그래서 8시간에 걸친 수술, 3개월에 걸친 입원, 재활치료 3개월. 거의 6개월을 테러에 대한 회복을 위해서 보냈던 기억이 있습니다.

    ◇ 김미화> 죽음의 위협 같은 걸 느끼셔서 외국으로 가셨어요?

    ◆ 장호권> 장준하 선생님은 알려지신 분인데, 그 분을 저렇게 했는데 나 같은 건 쉽게 없앨 수 있겠구나. 굉장히 무서운... 힘든 환경에 접해서 일단을 여기서 도망을 가야겠다. 그래서 나갔죠.

    ◇ 김미화> 생활은 어떻게 하셨어요? 가족들이 고통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은데.

    ◆ 장호권> 그 당시 생활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죠. 사극은 많이 보셨을 텐데, 사극을 보면 이런 장면들이 나옵니다. 조선시대 같은 때 역모로 몰려서 가족들이 풍비박산이 나서 노예로 팔려가고 먹지 못하고 죽음을 당하고. 그런 정도로 저희 집안은 풍비박산이 난 적이 있었죠. 밥 3끼 먹기가 힘들고 취직 한 번하려고 가면 그 다음날 기관원이 사장을 찾아가서 압력을 넣고. 굶겨 죽이려고 했죠.

    ◇ 김미화> 아버지랑 친한 친구 분들은 찾아가보셨어요?

    ◆ 장호권> 가까운 분들은 위협을 당하고 계셨어요. 자기 회사에 운명까지도 생각하고, 자신의 위치에 상당히 위협을 당했기 때문에 뒤로 저희에게 생활비를 좀 주면서 우리 회사는 오지 말아라. 그러한 일들이 왕왕 있었습니다. 가족이 먹고 살기 위해서 뿔뿔이 흩어졌죠. 갓 대학을 나온 여동생 들은 시집을 보냈죠. 제주도로 보내고 김포로 보내고 막내 동생은 신학을 보내고 어머님은 제주도로 시집 간 집으로 위탁을 하고. 저는 외국으로 도망가고. 37년이 지난 지금도 가족이 한 자리에 못 모였죠.

    ◇ 김미화> 가장 용서되지 않는 점은 뭘까요?

    ◆ 장호권> 소위 역사를 왜곡시키고 정말 암울하게 이 나라를 후퇴된 나라로 몰아 넣었던 죄인들이 용서를 구하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서 기득을 누리려고 애를 쓰는 것. 이것은 정말 용서가 되지 않는 거죠.

    ◇ 김미화> 박근혜 후보의 경우 고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조사에 대해서 과거대신 미래로 갔으면 좋겠다. 이렇게 입장을 밝혔거든요.

    ◆ 장호권> 이런 일이 일어나고 많은 얘기들이 있는데, 저 개인도 그렇고 저희 집안 입장은 박근혜 후보에게 장준하 선생님의 의문사에 대해서 책임을 묻거나 이런 건 안하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한 편 박근혜 후보가 할 의무도 없다고 생각해요. 단지 박근혜 씨가 여권의 대선주자로서 대통령을 하려고 한다면 소위 이러한 잘못된 역사를 바로잡는데 앞장서서 해결을 해줘야 할 것이고 장 선생님뿐만 아니라 의문사를 당한 많은 사람들의 아픔을 솔선수범해서 정리해주고 관심을 갖고 노력해주는 것이 대통령 후보로서 할 일이 아니냐. 그런 의미에서 박근혜 씨가 입장표명을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 김미화> 개인적 연좌제가 아니라 대통령 후보로서 진일보한 해법을 내놓길 기대한다는 거죠?

    ◆ 장호권> 그러죠. 미래로 가자고 했는데, 후보로 확정이 되고 나서 필요하다면 조사를 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이런 얘기를 했을 때 진정 이 나라의 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그런 사고와 역사 인식을 가져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김미화> 지금 대통령에게 진상조사를 요청하셨는데, 기대를 하고 계신가요?

    ◆ 장호권> 저희가 그런 얘기를 들었어요. 왜 대통령에게 진상요청을 했느냐? 과거 진상규명위가 대통령직속산하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요구하는 거죠. 저희는 이 정권, 이 정부에서 장 선생님에 대한, 어떻게 보면 상당히 정치적으로 예민한 사안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정치권에서는 정쟁으로 삼는다 삼지 말아라 그렇게 말도 오고 갑니다만, 그런 걸 다 떠나서 저희 가정은 아버지의 사인에 대해 명확히 밝혀달라고 하는 거니까. 대권 후보든 누구든 어떤 후보가 되든 아버지 사인을 밝히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하고, 얼마 남지 않은 이 정부에서는 진상규명을 해달라는 요청에 아마 대답이 없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기 정부로 아마 넘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행히 받아줘서 진상규명 하겠다면은 바람직 한 것이고.

    ◇ 김미화> 기대를 안 한다, 이런 말씀이시죠?

    ◆ 장호권> 큰 기대는 안 합니다.

    ◇ 김미화> 장준하 선생님이 어떤 분이신지 지금 청년들은 잘 모를 것 같아요. 아버님으로서 어떤 모습이셨나요?

    ◆ 장호권> 글쎄 제겐 사실 아버지의 모습은 별로 남는 것이 없습니다. 굉장히 어려우신 분. 저한테는 특히 장남이다보니 굉장히 엄격하셨어요. 그리고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제 아버님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어려서부터. 제가 자라서 성인이 된 다음 그 분이 무엇을 하는 분이고 무엇을 꿈꾸는 분인지 알기에 모시고 다니면서 아버지가 아닌 사회적 공인으로 모시고 다니다 보니까 아버지로서의 모습은 별로 기억에 없습니다.

    ◇ 김미화> 아버님이 <사상계>도 발간하시고 광복군에도 합류하시고. 어떠세요? 아버님이 아닌 외부에서 활동하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 장호권> 제가 호칭을 아버지가 아니라 장준하 선생님이라고 하는데. 그 분은 사상, 생각은 그거예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게 민족혼, 민주혼, 자유혼으로 똘똘 뭉쳐 계신 분이다. 그리고 국가가 위기에 봉착했을 때 국민이 특히 젊은이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실천적으로 보여주셨다. 그리고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이익은 개인 이익에 앞선다는 것을 보여주신 분 같습니다.

    ◇ 김미화> 이제 어떤 해법이 필요할 까요?



    ◆ 장호권> 이 사건은 장준하 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우리가 암울했던 과거사를 정리하는 문제거든요. 이를 위해서 첫째, 관계자들이 피를 깎는 노력을 해서 진실을 규명하는 것. 그리고 국민들이 관심을 더 많이 가져주는 것. 그래야만이 위정자들이 무관하지 않게 과거사 진실규명을 위해 노력을 할 것이다. 아니면 과거사를 역사 속에 묻혀버리고 과거사가 묻혀버리고 올바른 미래를 살 수 없지 않느냐. 그것만이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밝히느냐 아니면 묻고 암울한 역사를 되풀이 하느냐. 그것밖에 없습니다.

    ◇ 김미화> 어려운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 장호권> 네.

    ◇ 김미화> 고 장준하 선생님의 장남이신 장호권 선생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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