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설, 선택할 권리'? 尹정부의 50년 후퇴한 '글로벌 스탠다드'
▶ 글 싣는 순서 ①[르포]자물쇠로 잠긴 시설…기자는 '장애인의 고려장'을 봤다
②[르포]'목욕재계' 주혁씨도, '싹싹한 하겸씨'도 시설에 남겨진 이유
③정부 지원에 '울고 웃는' 장애인 가정…"시설만은 안 갈래요"
④'시설, 선택할 권리'? 尹정부의 50년 후퇴한 '글로벌 스탠다드'
(계속)
"장애인의 자유롭고 평등한 삶을 실현하는 사회, 윤석열 정부의 든든한 약속입니다. 유엔 장애인권리협약 등 글로벌 정책 트렌드에 부합하도록 전 생활영역에서의 장애인의 권리보장을 확대합니다."
윤석열 정부는 지난달 9일, 윤 대통령의 복지철학을 담았다며 장애인 정책 청사진의 '제6차 장애인정책종합계획'을 발표했다. 특히 정부는 '약자복지'와 '글로벌 스탠다드' 등에 초점을 맞춰 종합계획을 추진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정작 '글로벌 스탠다드'로 널리 인정받는, 장애인 시설에 거주하는 장애인이 지역사회로 복귀하는 '탈(脫)시설' 정책에 대해서는 제동을 걸면서 정책적 모순에 빠져있다.
진짜 글로벌 스탠다드, 탈시설 가이드라인…"선진국 의문 없어"
"당사국(당사자 국가)은 모든 형태의 시설수용을 폐지하고, 시설 신규 입소를 금지해야 하며, 시설에 대한 투자를 막아야 한다. 시설수용이 장애인의 보호 조치 혹은 '선택'으로 고려돼서는 절대 안 된다."
국제연합(UN) 장애인권리위원회가 지난해 9월 9일 회원국들이 '유엔장애인권리협약'을 이행하도록 공개한 '탈시설 가이드라인'의 일부다. 위원회는 전 세계 7개 지역에서 500명이 넘는 장애인과 시민사회단체를 만나 장애인거주시설 수용 피해 사례를 청취해 가이드라인을 작성했다.
"시설수용을 지속하는데 어떠한 정당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는다. 당사국은 지역사회 지원과 서비스의 부족, 빈곤, 낙인을 시설 유지나 폐쇄 지연 정당화에 이용해서는 안 된다. 포괄적 계획, 연구, 시범 사업 또는 법률 개정의 필요성이 탈시설 개혁을 지연시키거나 지역사회 통합을 지원하기 위한 즉각적인 조치를 제한하는데 사용돼서는 안 된다."
이처럼 장애인 탈시설 정책은 글로벌 스탠다드로 인정받고 있다. 이미 스웨덴, 캐나다 등 일부 선진국에서는 약 50년 전부터 장애인 정책이 탈시설을 향해 나아가야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특히 스웨덴에서는 1960년대 초부터 장애인 시설 폐지를 논의했고, 1994년 장애인 서비스법을 도입하면서 2천 년 모든 시설을 폐지했다.
영국의 경우 90년대부터 지방정부를 중심으로 돌봄서비스를 확대·발전하며 탈시설을 꾀하고 있다. 그나마 우리나라와 사정이 비슷한 일본 역시 2012년 '장해자자립지원법'을 개정하며 장애인 지역생활이행지원제도를 도입하고, 탈시설 장애인에 대한 1:1 밀착 탈시설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정책 방향을 확고히 하고 있다.
한때 한국 정부도 '탈시설이 글로벌 스탠다드'라는 사실을 직접 홍보하고 나선 바 있다. 불과 2년 전 보건복지부는 '탈시설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로드맵'에서 "장애인의 탈시설 및 자립은 장애인 정책의 시대적 패러다임"이라고 선언했다. 당시만 해도 정부는 미국, 캐나다 온타리오주, 스웨덴, 영국, 일본 등 해외 탈시설 역사까지 적극 소개했다.
대구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조한진 교수는 "(탈시설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은) 국제적으로 이미 50년 전쯤인 1970대부터 나온 얘기다. 추세를 보면 이미 탈시설이 완성됐거나 거의 완성돼있지 지금 (한국처럼) 탈시설 자체에 대해서 대놓고 이의를 제기한 나라는 적어도 선진국에는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장애인권리협약 자체가 국제 조약인데 한국에서 비준했기 때문에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갖는다"며 "그곳에서 만들어낸 문서도 스탠다드가 돼야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덧붙였다.
윤석열 정부 "글로벌 스탠다드"…'탈시설'과는 반대로?
그러나 '글로벌스탠다드'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에서 유독 탈시설 정책과 역행하는 정책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장애인 정책 예산을 분석해보면, '탈시설'보다는 '시설 유지·보완'에 쏠려있는 경향이 뚜렷하다.
정부가 올해 탈시설과 관련해 추진하는 사업 중 유일한 탈시설 주거 서비스 사업인 '장애인 지역사회 자립지원 시범사업' 예산은 약 96억 6800만 원(국비 50%, 지방비 50%) 뿐이다. 정부 장애인 관련 총 예산의 0.1% 수준에 불과한 수준이다.
반면 나라살림연구소 이상민 연구위원의 분석에 따르면, '장애인거주시설 운영지원'에 쓰이는 예산은 국비 6340억 원에 지방비까지 더하면 1조 원이 넘는다.
이상민 연구위원은 "현재 장애인 거주시설 운영지원에 지나치게 많은 예산이 분배됐다"며 "현재 시설 예산 1조 원을 탈시설로 돌리고 기초생활보장제도를 활용한다면 재정적으로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윤석열 정부 스스로 제시했던 '장애인 개인예산제' 예산도 증액되지 않았다. 활동지원 급여 중 10%를 공공분야인 발달재활, 긴급돌봄, 의료비, 주택 개조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로, 여러 장애인 단체들에 호평을 받았지만 정작 예산안에서는 외면받았다.
정작 윤 대통령은 장애인의날인 지난 20일에도 "자신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선택할 수 있는 개인예산제 등 실생활과 맞닿아 있는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올해 예산은 1조 9천억 원으로, 지난해 예산에서 약 2천억 원만 올라 사실상 제자리걸음 수준이다. 활동지원금은 크게 오르지 않은 상태에서, 사용처만 넓어졌으니 서비스 사용자가 체감하는 제도 효과는 반감될 수밖에 없다.
중증자폐인 아들을 돌보는 A씨는 "지금도 활동보조금이 부족해서 매달 사비로 250만 원 이상을 쓰고 있는 상황"이라며 "추가 예산이 없는 상태에서 자유롭게 쓰라는 것이 이해가 안된다"고 말했다.
정부뿐 아니라 서울시 역시 탈시설 정책과 멀어지는 분위기다.
서울시 장애인복지위원회 탈시설소위원회는 2012년부터 교수, 시민단체, 장애인시설운영자 등 7명이 모여 장애인 정책에 관해 논의해왔다. 이전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 활발히 활동했지만, 오세훈 서울시장 취임 이후 2년 여 임기 동안에는 1년에 한 번 모이기도 어렵다.
오 시장은 지난달 21일 덴마크 장애인 거주시설을 방문해 "여러가지 경우의 수를 높여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게 가장 이상적인 방향"이라며 "어떤 분들은 시설에서 생활하는 것이 훨씬 더 절실한 사람이 있다"고 탈시설 가이드라인에 정면으로 반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탈시설, 일부 장애인단체의 이권 사업이다?
일각에서는 일부 장애인 단체가 이권을 위해 탈시설을 주장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활동지원서비스 중개기관이 수수료를 가져가므로 탈시설 예산을 늘리자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활동지원서비스중개기관이 가져가는 수수료는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복지부에서 제작하는 활동지원서비스 지침에 따르면, 활동지원서비스 단가의 75% 이상은 반드시 활동지원사 임금으로 쓰도록 돼있다.
올해 활동지원서비스 단가는 시간당 1만 5570원이다. 여기서 활동지원서비스 중개기관이 25%를 수수료로 떼어가지만, 이를 활동지원 전담인력 인건비, 4대보험, 복리후생비, 퇴직적립금, 운영기관 사무실 유지비 등에만 써야 한다고 용처가 엄격히 규정돼 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정다운 정책실장은 "활동지원사의 주휴수당, 퇴직적립금 등 근로기준법에 맞춰 급여를 지급하려면 실제로는 단가의 75%를 넘어서 80~90% 정도를 급여로 쓰게 된다"며 "활동지원사를 적절하게 연결시키는 일을 하는 담당 인력에도 쓰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23.04.25 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