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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전시

    1:1로 본 서울의 재발견 - 사직단 : 환구단

    잊혀진 정신의 뿌리, 사직단과 환구단

    환구단(위), 사직단(아래).

     

    조선시대에 ‘종사’를 보존한다는 말은 곧 ‘나라’를 지킨다는 뜻이었다. 여기서 ‘종사’란 종묘와 사직.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교시설이자 조선을 떠받치는 정신적인 지주다. 종묘는 역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으로 정치적 정통성을 대변한다면, 사직은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제단으로 경제적 정통성을 상징한다.

    유교국가 조선은 화려한 종교 건축 자체를 멀리했다. 합리적 성리학 이념을 추구하던 조선의 건축은 궁궐이나 종교시설에서 기본적으로 검소하고 소박하면서 자연적인 멋을 추구했다. 수려한 불교건축이 꽃을 핀 다른 아시아 국가나 웅장한 기독교건축을 뽐내는 유럽 국가와 달랐고, 그래서 다른 나라의 역사도시들에 넘쳐나는 역사적 종교건축이 서울에는 많지 않다. 그 가운데 그나마 대표적인 것이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경복궁의 좌우에 세워진 종묘와 사직 그리고 성균관에 있는 문묘(공자의 신위를 모신 사당)이다.

    경복궁의 서쪽에 만들어진 사직단. 조선 개국 후 한양 천도와 때를 같이 해, 태조 4년(1395)에 경복궁, 종묘와 함께 건립됐다. 풍흉과 나라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믿었던 ‘사직(社稷)’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토지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사단은 동쪽에, 곡식의 신에게 제사 지내는 국직단은 서쪽에 배치하였으며, 신좌는 각각 북쪽에 모셨다. 제사는 2월과 8월 그리고 동지와 섣달 그믐에 지냈다.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나 가뭄에 비를 기원하는 기우제 그리고 풍년을 비는 기곡제들을 지냈다.

    사직단이 네모난 형태로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예로부터 <天元地方>이라 해서 원은 하늘을 상징하고 네모는 땅을 상징했다. 그래서 하늘에 제사지내는 단은 둥글게, 땅에 제사지내는 단은 네모나게 쌓았다. 땅과 곡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정방형의 네모 형태를 띤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02년 사직단과 사직단의 임무를 맡는 사직서가 다른 곳으로 옮겨지고, 일제는 사직단을 훼손하고 체육시설을 들이면서 공원으로 삼았다. 종묘와 함께 조선의 정신적 원형을 이루는 종교시설인데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에 비해 사직단이 시민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은 그 때문이다. 그저 사직공원으로 인식되고 있을 뿐. 사직단을 온전히 복원하고 역사성을 되살리는 일이 시급하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땅에 제사를 지내는 사직단이 있다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도 있어야 할 텐데,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단은 왜 없었던 것일까?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제천단이 조선 개국부터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하늘 제사는 천자로서 황제만이 올릴 수 있다는 중국의 외압으로 1465년 세조 10년에 제천단은 폐지됐다. 결국 하늘 제사 없는 땅 제사, 제천단 없는 사직단은 중국의 속곡이자 조공국인 조선의 한계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사직단. (이진성)

     

    그러다가 드디어 하늘에 제사를 올리는 제천단으로 ‘환구단’이 만들어진다. 지금 서울광장 옆 소공동 조선호텔 뒤에 자리한 황궁우. 이 황궁우가 고종이 황제로서 하늘에 제를 올리던 제단 ‘환구단(원구단)’의 일부다.

    앞서 언급한 <天元地方>의 원칙에 따라 하늘에 제사지내는 환구단은 둥글게 만들어져 원구단이라고도 불렸다. 환구단에 지금 남아있는 황궁우는 팔각정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팔각은 원과 네모가 합쳐진 형태로 우주를 상징한다.

    고종이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환구단을 세운 것은 종교적 용도를 넘어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조선이 더 이상 ‘천자’의 나라 중국의 속국이 아닌 자주국임을 알리는 동시에, ‘천황’을 주장하는 일본과 대등한 독립국임을 보여주려던 선전물이 바로 환구단이다. 환구단이 자리한 곳은 청국 사신의 숙소인 남별궁 터. 남별궁을 헐고 환구단을 세운 것 역시 중국과의 오랜 주종 관계를 청산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환구단.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 제공)

     

    실제로 고종이 근대적 자주국가로서 ‘대한제국’을 선포한 1897년부터 5년간, 즉 대한제국 전반기는 자주적 근대화가 힘 있게 추진되던 시기였다. 동양 최초의 ‘전기’ 시설 설치사업을 통해 일본보다도 2년 앞서 궁 안에 발전기를 두고 전등을 켰던 고종은,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설립한 뒤 1899년 첨단문명의 상징이었던 ‘전차’를 개설했다. 이는 당시 아시아에서 가장 근대화된 도시였던 일본 도쿄보다도 3년이 앞선 것. 그리고 1900년에는 서울의 거리에 600여개의 가로등이 설치됐다.

    1902년부터 8개월간 서울에 머물렀던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는 “서울에 도착한 여행자들이 가장 놀라워하는 것은 전차가 완벽하게 관리되고 있으며 그 전차들이 서울 근교의 성곽 밖에 이르기까지 주요 간선도로를 통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전차로 말미암아 서울은 근대적 교통시설을 갖춘 극동 최초의 도시라는 명예를 얻었다”고 술회했다.

    경운궁(덕수궁) 건축물에서도 서양의 양식을 우리 고유의 전통과 접합해 새로운 자주적 근대 건축을 모색했으며, 서울 도시계획에서도 경운궁(덕수궁) 앞 태평로, 을지로, 소공로의 서양식 방사선 도로 체계를 추진하고 탑골공원 등 근대적 도시공원을 설치하는 등 고종의 자주적 근대화의 노력이 빠르게 진행됐던 시기가 대한제국 전반기였다.

    이러한 대한제국의 정신적 상징이자 근원 지점이 바로 환구단이다. 경복궁 좌우에 있는 종묘와 사직이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종교시설이었다면, 대한제국의 ‘황궁’ 경운궁(덕수궁) 앞 환구단은 조선의 마지막 힘찬 자주 독립 근대화를 상징하는 정신적 탯줄이었다.

    대한제국을 병합한 일제는 1912년 환구단을 헐고 그 자리에 총독부 철도호텔을 세웠다. 그리고 이 건물은 1968년에 지금의 조선호텔 건물로 대치됐다. 현재 환구단 터에는 황궁우(3층의 팔각정자)와 3개의 돌북, 그리고 석조대문만이 남아있다.

    (이진성)

     

    환구단은 빌딩 숲 속인 조선호텔 안에 자리하고 있어서 일부러 관심을 갖고 찾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조선호텔의 정원이라고 알고 있는 이들도 적지 않다. 역사성을 잃고 시민들의 관심에서 멀어진 사직단처럼, 도심의 빌딩 숲 속에 숨어 찾기조차 힘든 환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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