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의 김주성 (사진/아시아선수권 공동취재단)
김주성(34·원주 동부)이 처음으로 성인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출국한 나라는 그리스였다. 1998년 세계남자농구선수권 대회가 열린 장소다. 당시까지만 해도 한국 농구의 세계 대회 및 올림픽 출전은 그리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김주성은 이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1998년 당시 김주성은 중앙대 1학년이었다. 서장훈, 전희철, 현주엽 등 쟁쟁한 선배들 아래에서 눈치를 보는 19세 막내였다. 출전 시간은 거의 없었다. 선배들의 벽이 워낙 높다보니 오랜만에 한번 나가도 2~3분 이상 코트를 밟지 못했다.
그래도 값진 추억이자 또 경험이다. 김주성은 그때를 잊지 못한다. "벤치에 앉아 농구를 보는 것만으로도 내게는 큰 도움이 됐다"고 회상했다.
이후 김주성은 한국 남자농구의 대들보로 성장했다. 4년 뒤인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대표팀의 주축 멤버로 활약하며 금메달을 따며 최고의 순간을 만끽했다.
그러나 그가 태극마크를 달고 뛴 무대는 아시아로 한정됐다. 한국은 1998년을 끝으로 다시는 세계 무대에 발을 내밀지 못했다. 김주성은 2년에 한번씩 아시아선수권 대회에 나가 고군분투했지만 돌아오는 결과는 씁쓸하기만 했다.
야구에 이승엽이 있다면 농구에는 김주성이 있다. 가끔 슬럼프에 빠질 때는 있지만 훈련과 경기에 임하는 자세, 성실함만큼은 기복없이 모두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김주성은 2011년 아시아선수권 대회를 마치고 조심스레 대표팀 은퇴 의사를 밝혔다. 지난 해 런던올림픽 최종예선 플레이오프에 출전하지 않았다. 1998년 이후 처음이었다.
유재학 감독을 비롯한 대표팀 코칭스태프도 그런 김주성의 발탁을 두고 고민했다. 대표팀 장신선수들 가운데 노련한 선수가 없다는 판단 하에 다시 김주성에게 손을 내밀었다.
당시 진천선수촌에서 만난 김주성은 "작년 대표팀에서 빠져 다시는 안할 줄 알았다. 그런데 유재학 감독님께서 불러주셨다. 어영부영 돌아온 것 같기는 하지만 필요성을 느껴 불러주셨다는데 대해 감사하게 생각한다. 국가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이후 누구보다 열심히 땀을 흘렸다. 솔선수범하는 선배의 모습에 후배들도 힘을 냈다.
경희대 4학년 센터 김종규는 김주성의 대를 이을 차세대 빅맨이다. 그는 대표팀이 사활을 걸었던 지역방어 훈련을 떠올리며 "주성이 형이 하는 것을 보고 계속 배우니까 더 쉽게 배울 수 있었다"며 선배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했다.
김주성은 필리핀 마닐라에서 열린 제27회 아시아선수권 대회에서 고비 때마다 공수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그 결과 한국 남자농구를 16년만에 다시 세계 무대에 올려놓았다. "마지막 도전이다. 꼭 가고싶다"며 의지를 불태웠던 그가 마침내 목표를 이룬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이 내년 스페인 농구 월드컵에서 뛸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욕심은 없다. 후배들에게 길을 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자세다.
김주성은 "내가 뽑히지 않아도 후배들에게 좋은 기회를 열어줄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