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 12.12 쿠데타 당시 전두환 측을 진압하려 출동했다가 다시 부대로 돌아간 제9공수여단장 윤흥기 예비역 소장이 17일 새벽 별세했다. 향년 80세.
고인은 당시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를 저지하기 위해 싸운 핵심 장성 5명(정승화 육군 참모총장,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장태완 수경사령관,김진기 헌병감,윤흥기 9공수여단장) 중 마지막 생존자다.
12.12 쿠데타 당시 부천에 주둔하고 있던 9공수여단장이었던 고인은 신군부측과 진압군측인 육군본부 수뇌부가 쌍방의 병력출동을 둘러싸고 실갱이를 벌이던 12일 밤11시 40분경 육군본부의 지시로 병력을 출동시켰다.
이 부대가 먼저 육군본부에 도착해 방어태세를 갖췄을 경우 쿠데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9공수여단은 "서울시민의 피해가 예상되니 일단 쌍방이 철수한다"는 육군본부와 신군부의 신사협정에 따라 도중에 다시 부대로 돌아간다.
이 틈을 타 신군부측은 1공수여단을 출동시켜 육군본부를 점거하고 노재현 국방부장관을 압송한다.
결국 '장군들의 밤'이라는 12월 12일의 사태 전개는 9공수여단의 향방에 달린 셈이었다.
윤 장군이 9공수여단장에 취임할 때 그에게 지휘관 견장을 달아주었던 지휘관은 정병주 특전사령관과 전임 여단장이었던 노태우 준장이었다.
그 직후 노태우 준장은 별 하나를 더 달고 제9보병사단장으로 영전했고, 12·12 당시 노태우 소장이 동원했던 9사단 병력은 쿠데타를 성공시키는 데 쇄기를 박았다.
여단장 취임식에서 윤 장군에게 견장을 달아주었던 정병주 특전사령관은 자신의 지휘 아래 있던 3공수여단 반란군에 의해 총상을 입고 강제 예편당한 뒤, 10년의 세월을 회한 속에 보내다가 1989년 3월 4일 백골의 사체로 발견됐다.
생전 정 장군과 윤 장군은 각별한 사이였다고 알려져 있다.
12·12 직후 여단의 지휘권을 하나회원이었던 이진삼 준장(육사 15기, 육군참모총장 역임)에게 넘겼던 윤 장군은 1983년 1월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을 끝으로 30년 동안 입었던 군복을 벗어야 했다.
부인 정혜자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윤 장군의 전역을 "타의에 의한 강제전역"이었다고 단언했다.
"우리 영감님이 12·12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못했어요. 그래서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고 다녔던 것 같아요. 그게 전두환 대통령 눈에 들지 않았겠죠. 집에 와선 통 밖에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셨는데, 강제로 전역을 당한 것은 확실합니다."
윤 장군은 전역 후에도 쿠데타 당일 석연치 않은 복귀지시로 정치군인들이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제5공화국을 탄생시켜 군부독재가 연장되는 계기를 발본색원할 수 없었던 점을 안타까워했다고 했다.
그는 잘못된 과거를 청산하고 우리 사회에 법과 정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정승화 대장을 비롯해 12·12 당시 육본의 정식지휘 계통 아래 있었던 장군 22명을 규합, 1993년 7월 19일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 등 군사반란을 주도했던 34명을 반란 및 항명 등 혐의로 대검에 고소했다.
22명의 고소인 중에는 윤 장군의 친형 윤흥정(육사 8기, 2002년 별세) 예비역 육군 중장도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전투교육사령관으로 전남북 계엄분소장이었던 윤 중장도 광주시민들의 시위 진압에 소극적이라는 이유로 신군부에 의해 전격 교체되는 아픔을 겪었다.
지난 1988년 국회에서 열린 광주청문회에 출석한 윤 중장은 "부대원들에게 총을 빼앗기지도 말고 그렇다고 쏘지도 말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증언한 바 있다.
부인 정혜자씨는 "평소 '12·12에 대해서 책을 하나 쓰겠다', '유작으로 두 딸들 앞으로 남기겠다' 그러셨어요. 아직도 12·12에 대해서 잘못 알려지고 왜곡되어 있는 것을 바로 잡겠다고 책을 쓰시려고 오랫동안 자료도 준비하셨는데 지난 2000년 갑자기 방광암 3기 판정을 받으신 거예요. 그래서 그 자료들을 군 후배에게 드렸어요. 그분이 지금 출판을 준비하고 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