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의 상흔이 짙게 패인 그곳.
갈 곳 없는 피난민들이 판자를 붙여 옹기종기 모여 애환을 달래던 그곳.
하늘 끝까지 닿은 계단에 할 일 없는 노인들이 모여 얘기를 나는 그곳.
낡고 오래돼 젊은 사람들의 온기는 찾을 수 없는 그곳에 요즘 인문학과 문화의 향기가 불어오기 시작했다.
바로 부산사람들도 잘 모르는 중구 영주동, 대청동이다.
동구 대청동에 위치한 금수현의 음악살롱 2층 북카페. 인근에 사는 80대 노인이 책을 읽고 있다. (김혜경 기자/자료사진)
"얼마나 고향에서 음악을 하고 싶었겠노? 일본 유학 중에 옥살이하고, 달동네인 여까지 올라와서는 매일 그래 노래를 했다이가. 이 동네 사람들은 그 집 다 알지. 오갈 곳없는 기타쟁이, 노래쟁이들이 사흘 밤낮 노래했지 아마. 그 기억이 생생하다"
부산 중구 대청동 산복도로변.
6.25 전쟁을 전후 이곳에 피난 온 음악가들이 숨을 쉴 수 있는 좁디좁은 공간이 있었다.
바로 부산을 무대로 왕성히 활동한 음악가 금수현의 집.
그의 집을 모티브로 한 지역 문화 소통 공간이 '금수현의 음악살롱'이 지난 7월 중순 문을 열었다.
1층은 소공연장, 2층은 음악인들의 축을 담은 북카페로 꾸며져 있다.
건물 옆 계단을 장식하고 있는 담쟁이넝쿨이 서로 어깨를 걸치고 다정하듯 이곳은 남녀노소 국적을 가리지 않은 많은 이들이 인문학과 예술의 향기를 나눈다.
산복도로 르네상스 길을 걷던 20대 관광객과 이곳에서 평생을 한 80대 노인, 또 가끔 지역 주민들을 상대로 영어를 가르치는 아프리카 르완다 출신의 흑인 유학생이 어울려도 전혀 어색하지 않은 곳이다.
1층에는 니체강독, 구전서사낭송 트리스탄, 반야심경, 한문교실, 뽕짝인문학, 영화평론 등 인생학교와 숲해설, 우리춤, 스마트폰 영화 만들기 등 다양한 강좌가 매일 이뤄진다.
부산대 철학과 김동규 교수, 동아대 철학과 김명우 교수, 김형찬 대중음악평론가 등 내로라하는 명강사들이 빛도 값도 없이 이곳에서 지역민들과 소통하고 있다.
먹고 살기 어려워 문화 따윈 한 번도 접해보지 못했던 지역민들은 이곳에서 또 다른 삶의 의미를 찾는다.
"앞만 보고 달렸지. 여기 사람들 다 그래. 먹고 살기 힘들잖아. 문화 따위가 뭐라고 생각했겠어. 그저 사치일 뿐이지. 근데 말이야, 강의를 듣다 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내가 짜라투스트라나 니체를 어떻게 알았겠어. 그 속에 오묘한 삶의 진리가 있다는 게. 또, 가곡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내가 여기를 모르고 죽었으면 억울할 뻔 했어."
매일 음악 살롱을 찾는 홍순업(67)할아버지의 말이다.
우연히 찾은 관광객들은 뜻밖의 묵직한 깨달음을 담아간다.
대구에서 온 관광객 김정희(28)씨는 "색다른 여행을 하고 싶어서 배낭을 메고 무작정 걷기 시작했는데, 부산에 이런 곳이 숨어져 있다니 신기하다. 음악살롱 2층 북카페에 들렀는데, 한 할머니가 젊은 친구가 돈이 어딨냐며 유자차를 내어 주시는데, 이런 저런 얘기와 강의까지 듣고 나니 가슴에 많은 물음표와 느낌표를 담아간다"고 말했다.
위탁운영을 맡은 지식나눔공동체 이마고 황정미 대표는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배움에 있어 모두 적극적이고 열정적이다"며 "앞으로 금수현의 가족 창작 가곡제, 시낭송과 가곡의 밤, 그림책 포럼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과 동아리 활동을 추진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김동리의 소설 '밀다원 시대'의 배경이 된 밀다원이 다시 중구 영주동에 들어섰다. 한 관광객이 북항이 한눈에 보이는 2층 카페에서 책을 읽고 있다. (김혜경 기자/자료사진)
산복도로 길을 따라 약 200m 떨어진 영주동에는 또 다른 아담한 목조 건물이 얼굴을 빼꼼 내밀고 있다.
6·25 전쟁으로 피폐하고 실의에 빠진 예술가들이 희망을 얘기하고 새로운 꿈을 얻어 가는 꿀물이 흐르는 찾집이라는 '밀다원'.
당시 이 다방을 자주 찾은 작가 김동리는 밀다원을 배경으로 '밀다원 시대'를 집필했다.
그 밀다원이 다시 부활한 것.
2층 건물 안으로 들어서면 세련된 앞치마를 두른 60~70대 할머니 바리스타가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그들은 노인 일자리 지원센터를 통해 두달간 정식 바리스타 자격을 이수, 현장 실습을 마친 전문 바리스타다.
또, 커피와 곁들여 먹는 쿠키 또한 이 건물 1층에서 할머니들이 베이킹 수업을 받아 만들었다.
평생 허드렛일만 하며 어렵게 살아온 할머니들은 바리스타로 제2의 인생을 살며 더 없이 일에 대한 충만감을 느끼고 있다.
김정숙(67)씨는 "에스프레소니, 캐러멜 마키아토니 이름도 외우기 힘들었는데, 몇 달 간 계속 만들고 마시다 하다 보니 벌써 입과 손에 익었다. 직접 원두를 갈아 만드는 것이 처음이라서 얼떨떨했는데, 지금은 내가 먹어도 맛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서 늙은 할머니가 커피를 내려주니 화들짝 놀라면서 신기해하기도 하고 같이 사진도 찍는다. 청년들이 하는 일을 늙어서도 할 수 있으니 자신감이 생기고 행복하다"고 말했다.
입소문을 듣고 찾아 온 관광객들은 통유리 밖으로 펼쳐진 부산의 북항 앞바다의 모습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 바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