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정사상 초유의 정부에 의한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사건이 헌법재판소로 5일 넘어간 가운데 정당해산심판을 주제로 한 한국헌법학회 회장의 논문이 관심을 끌고 있어 소개한다.[편집자주]
한국헌법학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연세대 전광석 교수
통합진보당(진보당)의 비례대표 경선 부정 사건과 중앙위 폭력 사태를 겪으며 보수 정치권을 중심으로 진보당 해산 논의가 촉발된 지난해 여름 ‘정당 해산 심판 청구’ 사안은 일부 헌법학자들 사이에 관심 있는 소재였다.
현재 한국헌법학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연세대 전광석 교수는 이 시기 ‘정당해산심판에 대한 헌법적 및 정치적 이해’라는 제목의 논문을 발표했다.
‘헌법판례연구’ 13권에 실린 이 논문은 이석기 내란음모 사건 이전에 집필된 것이기는 하지만 이번 정부의 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가 진보당의 강령(당헌)과 활동에 대한 평가를 핵심으로 한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8조 4항) 여부를 가리는 것이기 때문에 전 교수의 논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볼 수 있다.
진보당의 강령에 대한 평가진보당 강령에는 ‘일하는 사람이 주인 되는 자주적 민주정부를 세우고, 대중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사회생활 전반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진보적 민주주의 사회를 실현한다’고 돼 있다.(서문)
정부는 이것이 북한 헌법 4조(주권은 노동자, 농민, 근로 인텔리와 모든 근로인민에게 있다)와 판박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문은 이 대목에 대해 정치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인 ‘대중’이 ‘주인’이 돼 자신들의 이익을 반영하는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는 선언으로 이해했다.
따라서 ‘대중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인정하는 기반 위에서 사회적 취약계층을 보다 중점적으로 보호하는 이념으로 봤다.
정부가 1945년 10월 김일성이 강연한 뒤 북한의 건국이념이 됐다고 본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논문은 “사회 취약계층이 주권적 주체임에도 정치에 배제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선언”이라며 “이 같은 선언의 내용을 공산주의 이념으로 평가하는 것은 객관적 타당성이 없다”고 강조했다.
진보당 강령에는 이어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등 한반도 동북아의 비핵 평화체제를 조기에 구축한다. 이와 연동해 주한민군을 철수시키고 종속적인 한미동맹을 해체해야한다’고 명시돼 있다.(44조)
정부는 이것 역시 그 동안 북한의 주장에 동조하는 것이라고 봤다.
그러나 논문은 “이 정책기조가 북한과 같은지 여부로 진보당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됐는지 판단해서는 곤란하다”고 일갈한다.
이들 개념은 민주적 기본질서와 무관한 정치적 정책적 선택의 범주라는 설명이다.
진보당 강령에는 또 ‘대표적인 반민주 악법인 국가보안법을 비롯해 반민주 제도와 악법을 폐지한다’고 기록돼 있다.(5조)
이것이 북한의 주의 주장과 비슷하다는 정부의 설명과 다르게 논문은 “국보법 존폐론에 대해서는 다른 법률에 의한 대체가능성 등에 대해 우리사회에서 오랫동안 논의돼 왔다”며 “이런 상황 속에서 국보법 폐지 주장을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반된다고 평가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서술했다.
이와 함께 진보당 강령에는 ‘국가 기간산업 및 사회 서비스의 민영화 추진을 중단하고, 국공유화 등 사회적 개입을 강화해 생산수단의 소유구조를 다원화하며 공공성을 강화한다’고 돼 있다.(11조)
정부는 이것이 생산수단의 국가 및 사회협동단체의 소유와 인프라에 대한 국가소유를 규정한 북한 헌법 21조와 맞닿아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해 논문은 정당해산 사유는 민주적 기본질서 위배 여부이기 때문에 사회경제질서에 대한 구상은 직접적인 정당해산 심판 대상이 아니라고 봤다.
특히 강령상의 ‘생산수단의 소유구조 다원화’가 헌법 테두리 안에 있고, 북한 헌법의 생산수단의 완전 국유화와는 더더욱 거리가 있다고 선을 그었다.
진보당의 활동에 대한 평가정부는 지난해 비례대표 부정선거 등을 들어 진보당이 민주적 선거제도와 의회 제도를 부정하고 있다고 봤다.
그러나 논문은 “그러한 개별적인 부정행위는 효력 상실을 통해 헌법의 규범력을 확보할 수 있다”며 “개별적인 부정행위가 정당해산의 사유가 되지는 않는다”고 못박았다.
정부는 진보당의 당원 및 당직자들 일부가 일심회, 왕재산 사건 등에 연루된 자들이라며 자유민주주의 기본 질서를 위협할 세력으로 봤다.
이에 대해 논문은 “공직선거법은 범죄행위로 인해 유죄판결을 받은 자의 피선거권을 부분적으로 제한하고 있다”며 “이러한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 한 국보법 등의 전력이 있다는 사실이 공직활동 및 정당활동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정부는 이 밖에도 진보당 당원들이 과거 김정일 사망시 ‘서거’, ‘애도’ 등의 표현을 써 국보법을 위반하고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논문은 “남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서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한 관계에 있는 상황에서 대화와 협력의 상대방인 국가지도자의 사망에 위로의 뜻을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런 반응이다”며 “남북기본관계를 고려하면 그런 표현은 국보법의 적용 대상이 아니며 따라서 민주적 기본질서와의 관련성은 처음부터 논의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논문은 또 진보당이 예비군 제도 폐지 등을 주장해 북한의 대남전략전술에 동조해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위태롭게 했다는 정부 주장도 반박한다.
논문은 “그런 주장이 북한 주장과 동일할 수는 있지만 북한과의 정책적 동일성이 민주적 기본질서에 위배되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아니다”며 “민주적 기본질서의 범주 내에서 얼마든지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사안이다”고 규정했다.
정부는 이른바 ‘이석기 사건’을 통해 RO 조직원 32명이 진보당의 요직을 장악해 북한의 지령에 따라 체제전복을 기도함으로써 남한 체제를 위태롭게 한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서는 해당 논문이 지난해 작성된 까닭에 검토되지 않았지만 이에 대해 저자인 전 교수는 “이석기 사건은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1명에 대한 처분이지 진보당 전체에 대한 것이 아니지 않냐”고 선을 그었다.
전 교수는 논문에서 “현재의 우리의 상황이 민주적 기본질서를 일탈하는 일부 정치적 세력이 있다고 해서 지배적인 헌법질서, 그리고 민주주의적 가치가 위협받는 상황이라고 보여지지는 않는다”며 “정당해산 심판 제소는 전체 진보정치세력에 이념전쟁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으며, 이로써 우리 사회는 안정적으로 공존해야할 보수와 진보의 정치지형이 정부의 행위를 통해 분열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를 나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