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 태풍 '하이옌'이 휩쓸고 간 필리핀 타클로반.
12일(현지시간) 폐허더미로 변한 타클로반 공항에 도착한 기자는 아직도 하이옌에 잔뜩 겁을 먹은 듯한 한인 신태호(52)씨를 만날 수 있었다.
대피 행렬에 섞여있던 신씨는 기자를 보자 "이게 바로 생지옥이구나 싶었다"며 그간 말로는 다 할 수 없었던 고통을 털어놨다.
공항 일대는 신씨처럼 죽음의 도시를 탈출하려는 행렬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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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부터 필리핀 정부와 국영 항공사가 군용기와 특별기를 띄워 주민 철수 작업에 돌입했지만 '탈출'을 바라는 주민들이 한데 몰리면서 이곳을 떠나는 비행기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신씨는 자녀 3명만이라도 먼저 안전지역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항공편 좌석을 구하려는 행렬에 동참했지만 표를 언제 받아들 수 있을 지는 알 길이 없다.
지옥같은 이곳을 떠나려는 사람들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타클로반의 문을 열고 제 발로 찾아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타클로반을 빠져나오지 못한 가족을 찾기 위해서다.
공항에서 만난 30대 필리핀 여성은 부모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특별기편으로 타클로반에 도착했다며 통신두절로 아직도 생사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애를 태웠다.
1만여명의 사망·실종자가 난 타클로반 일대는 태풍이 휩쓸고 간 지 나흘이나 지났지만 참혹함은 더욱 깊어가고 있다.
거리에 시신들이 방치돼 있는 것은 물론 온통 쓰레기를 뒤집어쓴 듯 악취가 진동하면서 숨조차 쉬기 어렵다.
일부 지역은 시간이 지나며 허리춤까지 찼던 물이 빠졌지만, 상당수 지역에서는 부패한 시신과 쓰레기, 태풍에 무너진 건물 잔해들이 한데 뒤엉키면서 정체모를 전염병 발병마저 우려되고 있다.
이날 오후 석양이 모습을 감춘 타클로반은 암흑천지로 변해 버렸다. 전기가 끊긴 탓에 주위를 둘러봐도 불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그나마 국제 사회가 본격적인 구호 활동에 착수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거센 태풍을 뚫고 살아남은 이들은 위로를 받는 모습이다.
이날부터 유엔과 국제적십자사 등 국제기구들이 현장 활동에 나선 가운데 한국 정부가 급파한 재난대응 인력도 현지에 속속 도착하고 있다.
외교부와 필리핀 주재 한국대사관이 함게 꾸린 긴급대응팀이 타클로반에 도착해 한국 교민의 안전을 확인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외교부 하이옌 피해대책 상황실의 황성운 상황실장은 "연락이 닿지 않은 교민은 주소지를 직접 방문해 안전여부를 확인할 계획이다. 철수를 희망하는 교민에 대해서는 항공편을 확보해 최대한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소방방재청 중앙 119 구조본부 소속 선발대원 2명이 이날 타클로반에 도착한 데 이어 13일에는 30명의 구조·의료인력이 들어와 구호 활동에 돌입한다.
한국국제협력단(코이카)도 현지에서 외교부 활동을 지원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타클로반 일대에 열대성 저기압이 영향을 미치며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해 추가 피해도 우려된다.
열대성 저기압인 '소라이다'는 이날 오전 9시께 하이옌 피해지역에서 430여km 떨어진 카라가에 상륙한 뒤 이동하고 있다.
필리핀 기상 당국은 소라이다의 경로가 남부 지역으로 치우칠 것으로 보이지만 경로가 유동적인 만큼 주의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