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사임당, 하이테크놀로지를 만나다/김세서리아/돌베개
신사임당(1504-1551) 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대학자 율곡 이이를 키워낸 '현모'? 남편 내조를 잘한 '양처'?
이 두 이미지 사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지도 모를 일이다.
여기 신사임당에 대한 색다른 해석을 내놓은 신간 '신사임당, 하이테크놀로지를 만나다'(김세서리아·돌베개)의 프롤로그 중 일부를 소개한다.
'그는 혼인 후에도 시집에 들어가지 않고 집안의 아들 역할을 하며 친정에 오래 머물러 살았다. 친정아버지의 3년상을 치르고 홀로 남은 어머니를 오랫동안 모시다가 38세가 되어서야 서울의 시집으로 들어갔다. (중략) 그런가 하면 그는 자신이 죽더라도 남편이 재혼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또 그림과 글씨, 자수 등을 통해 자신의 예술적 감각과 문학적 소질을 발휘하는 데 소홀하지 않아 자아실현이라는 측면에서도 뒤지지 않는, 주체적 면모를 갖춘 여성이었다. (10, 11쪽)'
신사임당을 현모양처의 아이콘으로 볼 것인지, 전통 사회에서 보기 드문 주체적 여성으로 평가할 것인지는 그의 삶과 행적에서 어떤 지점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 이 책의 견해다.
전통의 개념들을 여성주의라는 낯선 방식으로 해석함으로써 한국의 여성철학 이론을 정립하려 애써 온 지은이는 이 책을 통해 지금의 첨단과학 시대를 만나 겪게 된 여성들의 삶의 변화가 과연 긍정적인 것인지를 탐구한다.
'외모가 강조되는 현대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몸, 여성의 용모에 관한 관념은 전통 시대에 비해 해방의 의미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용모를 갖추어야 한다는 관념이 강조되지 않던 전통 유교 사회에서의 여성의 몸 가꾸기는, 현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강요되는 몸 가꾸기와 비교할 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 (114쪽)'
이러한 시도는 여성에게 사회적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선물한 하이테크놀로지가 그 너머에 더욱 교묘하고 억압적인 현실을 남기기도 한다는 것을 일러 준다.
'바느질은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져 왔기 때문에 값싸고 손쉽게 구할 수 있는 노동으로 간주된다. 그런데 임금은 사용 가능한 노동력의 공급도와 그 기술에 대한 숙련의 정도에 의해 결정된다. 즉 오랜 세월 동안 바느질이나 재봉틀 일을 해 온 사람이라면 숙련공으로서의 임금을 받기에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여성은 아주 오랫동안 바느질을 해 오고 재봉틀 앞에서 옷을 만든 이라고 해도 숙련공으로 대접받지 못한다. 아무리 능수능란하게 기계를 다룰 줄 안다고 해도, 바느질에 관한 한 여성들의 이 기술은 그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이런 기술적 숙련은 평가절하되면서 불충분한 임금 지급의 근거가 된다. (146, 147쪽)'
이 책은 이렇듯 여성을 사이에 두고 벌이는 전통 유교 이념과 첨단 과학기술의 팽팽한 삼각관계를 흥미롭게 다룬다.
첨단의 시대에 여성의 위치가 어떻게 자리매김되고 있는지를 살피고자 과거와 현재, 고전과 비고전, 일상과 학술 영역을 넘나드는 과정을 통해서다.
전통 시대 여성들과 그들을 둘러싼 환경을 입체적으로 살려낸 뒤, 이를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의 풍경과 교차시킴으로써 현실과 삶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인식틀을 내놓는다는 데 이 책의 미덕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