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중구 을지로3가에서 시작해 충무로까지 오밀조밀 인쇄소들이 들어찬 일명 '인쇄 골목'은 민족의 명절인 설날을 앞두고도 예상외로 한적했다.
일명 '찐빠'라고 부르는 검은 짐자전거나 경트럭이 인쇄물을 싣고 덜컹거리며 후가공업체로 향하기도 하지만, 골목은 싸늘한 날씨만큼이나 한산한 편이었다.
골목 곳곳에 빼곡하게 들어선 인쇄소마다 문을 열면 여전히 힘차게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울려 퍼져도, 정작 안에는 기계를 살피거나 인쇄된 시안 색감을 확인하는 직원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지난 1994년부터 20년 동안 일해온 전기용(40) 씨는 '요즘도 연하장을 인쇄하느냐'는 질문에 웃음을 지으며 "인쇄업계 일거리 자체가 예전 일감에 비하면 60%만 남았다"고 말했다.
대표적인 겨울 상품이었던 연하장은 경기 불황으로 설날이 아닌 신년에만 주고받은 지 오래다. 그나마도 문자메시지나 스마트폰 메신저 등으로 대체되는 바람에 연하장 일감은 찾아보기도 어렵다.
대기업의 청바지 카탈로그를 살펴보던 전 씨가 일하는 업체는 기업용 책자나 포스터, 카탈로그를 주로 만드는 업체여서 설날처럼 특정 시기의 영향을 덜 받는 편이다.
하지만 전 씨는 "예전과 달리 물건을 사도 마트 홈페이지나 스마트폰 앱으로 가격을 비교하기 때문에 전단 일감도 줄어든 상황"이라며 "통상 공휴일도 많고 학교 학기도 바뀌기 때문에 겨울을 인쇄업계의 성수기로 꼽지만, 이제는 겨울에도 일감이 많이 줄었다"고 귀띔했다.
인쇄업계가 어려워질수록 '빈익빈 부익부'는 극심해지고 있다. "그나마 있는 일도 일이 있는 대형 업체에만 몰리고, 없는 집은 겨울부터 놀거나 아예 하청업체로 전락하는 형편"이라는 것.
그나마 기댈 구석은 설 연휴를 맞아 대규모 할인행사를 벌이는 대형마트의 전단과 선물 상자 포장지라지만 이나마도 예전 같지 않다.
중견 인쇄업체 사장 L모씨는 "이제 마트 업계도 안정세로 돌아서면서 전단이 확 줄어들었다"며 "온라인 쇼핑도 급증하면서 소비규모가 비슷해도 포장 일감은 크게 줄고 있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대표적인 겨울 상품인 졸업앨범도 마찬가지다. 2월마다 다가오는 대학교 졸업에 대비해 책자 전문 인쇄업체들이 졸업앨범을 잔뜩 쌓아둘 때지만 예전에 비하면 물량이 확연히 줄었다는 게 업계의 설명이다.
한 책자전문 인쇄업체에서 일하는 강모(46) 씨는 "요즘 학생들은 사진을 자주 찍어서 졸업앨범을 반드시 가져야겠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며 "CD에 파일을 넣어 앨범과 함께 주다 보니 여러 명이 공동구매해서 파일로 나눠 가지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L씨는 "당장 6월 지방선거가 다가오면 봄부터 정신없이 바쁠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자동화된 디지털 인쇄기계가 확산되면서 겉보기에는 초라해 보여도 예전처럼 먼지가 자욱하고 잉크 냄새를 풍기던 인쇄 골목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했다.
역시 인쇄 일을 하던 아버지의 소개로 을지로 인쇄 골목에 뛰어들었다는 오건수(27) 씨도 "아직 인쇄업계에 젊은 사람들이 승부를 걸어볼 만하다"며 씩 웃었다.
오 씨 역시 처음 일을 시작할 때에는 쉽지 않았다.
"예전에는 밤새도록 일했다는데 지금은 일이 많이 줄어든 편이라고 들었다"며 아쉬워하던 오 씨는 "아직도 일감이 적지 않아서 2교대를 하다 보니까 밤낮이 일주일마다 바뀌는 게 쉽지 않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손에 익는데 보통 6개월에서 1년이 걸린다는 인쇄일에 오 씨가 발을 들인 지도 벌써 4년 차다.
이 곳에서는 보기 드문 젊은 나이에도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일찌감치 인쇄일에 뛰어든 덕분에 이제는 한 사람 몫을 너끈히 해내고 있다.
오 씨는 "처음에는 지저분하고 힘들어 보였지만 막상 해보니까 할수록 재밌고 신기한 일이 많다"며 "인쇄업계가 힘들다지만 책이 없어지지 않는 한 인쇄업이 죽지는 않을 것 아니냐"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