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 교체의 광풍이 몰아친 우크라이나에서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축출하고 새롭게 정치권력을 장악한 기존 야권 세력이 전(前) 정권의 잔재를 청산하고 새 권력 체제를 구축하는 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을 비롯한 전 정권 실세들을 시위대 대량살상 혐의로 형사 기소해 단죄하는 절차에 착수한 데 이어 시위대 진압에 앞장서며 야누코비치 정권을 수호하는 근위대 역할을 해온 경찰 특수부대 '베르쿠트'를 해체하는 결정도 내렸다.
대통령 권한 대행직을 수행하고 있는 신임 최고 라다(의회) 의장 알렉산드르 투르치노프는 군통수권까지 넘겨받았다.
하지만 동남부 지역에선 새 권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러시아계 주민들의 시위가 확산하고 있다. 동시에 새 권력을 지지하는 주민들도 맞불 시위에 나서 양측 간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 투르치노프 대통령 대행 군통수권 인수…야누코비치 근위대 '베르쿠트' 해체
러시아 리아노보스티 통신 등에 따르면 투르치노프 의장은 26일(현지시간) 군통수권을 넘겨받았다고 선언했다. 대통령 권한 대행을 맡고 있는 그는 이날 발표한 대통령 권한 대행령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
투르치노프는 지난 22일 야누코비치 대통령 축출을 결의한 의회에 의해 의회 의장과 대통령 권한 대행으로 선출됐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반대해온 우크라이나 최대 야당 '바티키프쉬나'(조국당) 소속인 투르치노프는 최근 출소한 율리야 티모셴코 전(前) 총리의 측근이기도 하다.
그는 티모셴코와 함께 지난 2004년 야권 주도의 반정부 시민혁명인 '오렌지 혁명'을 이끈 지도자 가운데 한명이었다. 이후 들어선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 정권에서 국가 보안국 국장과 부총리를 지낸 바 있다.
투르치노프는 5월 25일로 예정된 조기대선에서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될 때까지 국가원수 직무를 수행할 예정이다.
한편 우크라이나 내무부 장관 권한 대행 아르센 아바코프는 하루 전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경찰 특수부대 '베르쿠트' 해산 명령에 서명했다고 밝혔다.
앞서 23일 기존 야권 세력인 극우민족주의 성향 정당 '스보보다'(자유당) 소속 의원들은 의회에 베르쿠트 해산 법안을 제출했다. 의회는 26일 표결을 통해 베르쿠트 해산 명령을 추인할 예정이다.
베르쿠트는 대(對)테러작전, 소요진압 등을 목적으로 1992년 창설된 내무부 산하 경찰 특수부대로 약 4천명 정도의 부대원을 거느려왔다. 한국의 경찰특공대와 유사한 조직이다. 명칭은 독수리 중에서도 가장 몸집이 크고 사납기로 유명한 '검독수리'(Golden Eagle)를 뜻하는 러시아어에서 따왔다.
베르쿠트는 1991년 우크라이나가 옛 소련에서 독립한 이후 혼란기에 범죄조직 소탕, 민족 간 충돌 사태·프로축구 경기장 난동·각종 시위 등의 진압에 동원됐다. 지난해 말부터 불거진 야권의 야누코비치 정권 반대 시위 과정에서 시위대 진압의 선봉에 서면서 시위대와 시민들로부터 큰 원성을 사 해체 여론이 고조돼 왔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축출되고 난 뒤 일부 베르쿠트 대원들은 야권으로 돌아서기도 했다. 25일 서부 리보프주(州)에선 베르쿠트 요원 100여명이 야권 시위대 앞에서 무릎을 꿇고 최근 키예프에서 발생한 시위대 유혈 진압에 사과했다. 반면 전 정권에 충성하는 일부 대원들은 사직서를 제출하거나 무기를 들고 부대를 이탈하기도 했다. 러시아의 일부 정치인들은 이탈한 베르쿠트 요원들을 러시아 경찰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 검찰청, 야누코비치 대통령 등 본격 수사 착수
우크라이나 검찰청은 이날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을 비롯한 전직 고위 공직자들에게 키예프 독립광장 시위대 학살 혐의에 대한 형사 입건 통보가 전달됐다고 밝혔다.
기소자 목록에는 야누코비치 외에 전 대통령행정실 실장(비서실장) 안드레이 클류예프, 전 검찰총장 빅토르 프숀카, 전 내무장관 비탈리 자하르첸코, 전 국가보안국 국장 알렉산드르 야키멘코, 전 내무군 사령관 스타니슬라프 슐략 등이 포함됐다고 검찰청은 설명했다.
검찰청은 이 사건과 관련한 수사 차원에서 대통령 행정실과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관저, 국가안보국방위원회, 중앙은행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이루어졌다고 소개했다.
검찰청은 이들 공직자들이 재판을 통해 유죄 판결을 받을 경우 10~15년의 징역형이나 무기징역형에 처해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한편 과도 정부 구성도 이르면 26일 중 마무리될 예정이다. 기존 야권 세력은 이날 키예프 시내 마이단광장(독립광장)에서 대중집회를 열어 새 내각 구성원들을 소개하고 하루 뒤 의회에서 승인을 받을 예정이라고 '바티키프쉬나'(조국당)이 이날 자체 사이트를 통해 밝혔다.
◇ 크림반도서 親러시아 시위 확산…심페로폴선 폭발도
기존 야권이 권력을 굳혀가고 있는 중앙과는 달리 친러시아 성향이 강한 동남부 지역에선 친서방 노선을 표방한 중앙 권력에 반대하는 저항 움직임이 확산하고 있다.
동시에 이들에 맞서는 중앙 권력 지지 세력도 맞불 시위에 나서 양측 간에 충돌 위험이 고조되고 있다.
흑해 연안에 있는 크림반도의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에선 26일 새로 들어선 중앙 권력을 인정하지 않는 친러시아계 시위대 수백명과 새 권력을 지지하는 타타르인 시위대 수천명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이 과정에서 크림 공화국 의회 건물 인근에서 이날 오후 폭발이 일어났다고 이타르타스 통신이 전했다. 하지만 자세한 폭발 상황에 대해선 알려지지 않고 있다.
친러 시위대는 "크림을 사수하자", "러시아" 등의 구호를 외쳤고 무슬림 신자들인 타타르 시위대는 "크림은 러시아가 아니다", "알라흐 아크바르(신은 위대하다)" 등의 구호를 외치며 맞섰다.
양측에서 일부 시위대는 경찰의 분리선을 뚫고 몸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대 여려명이 부상을 입기도 했다고 인테르팍스 통신은 전했다.
하루 전 심페로폴의 러시아계 주민 수천명은 시내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고 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에서 독립하는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했다.
시위대는 크림자치공화국 의회 의장 블라디미르 콘스탄티노프가 비상 회의를 소집해 이 문제를 토의하라고 촉구했다. 일부 시위대는 '우리는 크림인이며 우리의 형제는 러시아인'이라는 구호를 외치며 러시아로의 합병을 주장했다.
과격 시위대 수백명은 의회 건물을 봉쇄하고 크림 의회가 키예프 중앙 의회의 결정에 따르지 말고 크림의 지위에 대한 주민투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콘스탄티노프 의장은 이르면 26일 비상 회의를 열어 공화국의 지위에 대한 주민투표 실시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키예프에 새로 들어선 권력이 크림 의회를 재구성하려 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이러한 지시에 따르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 '크림엔 크림의 권력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계속하던 주민들은 시위가 끝날 무렵 의회 건물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크림반도의 주요도시 세바스토폴에서도 23일부터 친러시아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인테르팍스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계 주민들이 중심이 된 시위대에 의해 새 시장에 선출된 알렉세이 찰리는 25일 시위대의 활동을 조정할 대(對)테러센터를 설립하고 중앙 권력에 맞서는 저항 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크림반도의 또다른 도시 케르치에서도 러시아계 주민들이 시위를 벌이며 시정부 청사에 러시아 국기를 게양하기도 했다.
크림반도는 50% 이상의 주민들이 러시아인들로 우크라이나에서 친러 성향이 가장 강한 지역이다. 세바스토폴항에는 러시아 흑해함대가 주둔하고 있다.
러시아 의회는 크림반도의 러시아인들에게 간소화한 절차에 따라 러시아 국적을 부여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다. 크림 주민들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요구하는 결정을 내리면 러시아가 이를 수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일각에선 독립과 러시아 병합을 추진하는 크림 공화국의 분리주의 움직임을 누르기 위해 우크라이나 중앙 권력이 군부대를 파견하고 이에 러시아가 무력대응하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