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봄, 영국 독서시장에 파란이 일었다. 세계인의 관심을 휩쓴 '해리 포터' 시리즈를 제치고 100만 부 판매를 가장 먼저 돌파한 메가 베스트셀러가 탄생한 것이다. 화제의 주인공은 전 세계에서 모두 1억 부 넘게 팔린 19금 로맨스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 시리즈.
인간의 감정을 폭넓게 연구하는 데 매진해온 감정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신작 '사랑은 왜 불안한가'(돌베개)는 이 '그레이 시리즈'를 분석도구로 삼아 현대 이성애 관계의 한 형태로 자리잡은 사도마조히즘(BDSM)과 그 이면에 숨겨진 사회의 잠재의식을 파고든 결과다. 일루즈는 전작 '사랑은 왜 아픈가'에 이어 '사랑의 심리학을 넘어서는 사랑의 사회학' 연구를 이어나간다.
일루즈는 사회의 잠재의식이 투영된 결과물로서의 베스트셀러에 주목한다. "당대에 큰 성공을 일궈낸 책은 그 사회가 품었던 규범과 이상이 무엇인지 짚어볼 바로미터"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아울러 현대인의 성과 애정생활이 처한 실상을 고찰한다.
그는 BDSM으로 불리는 현대의 '은밀하고 괴이한' 사랑관계가 단순히 개인의 심리적 차원에서 발생하는 문제가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 발달의 다층적 산물이라는 통찰에 이른다. 나아가 지극히 내밀하고도 개인적인 행위로 여겨지는 섹스조차 실은 다분히 사회적인 행위라고 말한다.
일루즈는 BDSM을 계몽의 일부라고 본다. 초월적 존재인 신에 바탕을 둔 질서정연한 도덕적 우주가 와해된 현대의 도덕이 애매모호함, 불확실성, 불특정성이라는 문제로 골치를 앓게 된 상황에서 그 문제의 내재적 해결책은 스스로 빚어낸 확실성에 기초해 행동할 때에만 찾을 수 있으며, 구조적으로 불안정한 현대의 애정간계를 풀어줄 해결책으로서 BDSM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닌지 되묻는 것이다.
"'그레이 시리즈'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오늘날 남성과 여성의 성관계를 특징짓는 숱한 난제가 무엇인지 명확히 드러냈으며, 주인공들의 사도마조히즘적 관계가 이 난제의 상징적 해결책인 동시에 극복 방법이기도 하다는 점을 제시했다는 것이, 내가 펼치는 주장의 골자다."(3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