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사진 (사진 = 이미지비트 제공)
남발하는 고소고발로 인해 검찰 수사가 좌지우지되고 있다. 정치, 사회 각 분야에서 건전한 토론과 논쟁으로 풀어야 할 현안들이 모두 검찰로 쏠리는 현상도 가중되고 있다. 비리 척결이라는 검찰 본연의 업무보다는 각종 사건의 민원 창구로서 수사력이 낭비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오히려 검찰이 일부 공안사건 수사를 위해 고소고발을 적극 이용하는 현상도 나타난다. CBS는 고소고발에 휘둘리는 검찰의 현 모습을 재조명해본다. [편집자주]
서울 서초동에서 이른바 '고발왕'으로 불리는 시민단체 활빈단 대표 홍정식씨(65)씨. 홍씨는 일주일에 많게는 세 번 이상, 적어도 한 번은 고발장을 들고 경찰서나 검찰청사를 찾는다. 고발장 접수 직후에는 사회부 기자들에게 즉각 보도자료를 배포한다. 평소 뉴스를 모니터링하다 문제가 된다 싶으면 직접 법조항을 찾아보고 고발장을 작성한다고 한다. 어떤 이슈든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 홍씨의 설명이다.
"저도 초창기에는 1인시위부터 각종 시민운동을 해봤지만 고발만큼 확실한게 없습니다. 아무래도 검찰이 관여하면 사람들 관심도 집중되고, 홍보 효과도 제일 확실합니다"
홍씨를 비롯한 일부 보수단체의 고발은 일상화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적, 사회적 현안이 발생하면 얼마 지나지 않아 관련 인물에 대한 고발장이 서초동 검찰청사로 접수된다.
실제로 검찰의 굵직한 수사들이 보수단체의 고발로 촉발됐다. 박근혜정부가 들어선 이후 명예훼손 수사가 가장 두드러지는 추세이다.
가토 다쓰야 전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의 명예훼손 수사가 대표적이다. 독도사랑회와 자유청년연합 등은 박근혜 대통령의 세월호 참사 당일 '7시간'의 의혹에 대해 보도한 가토 전 지국장을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이후 검찰이 신속한 수사 끝에 기소 결정을 하면서 국제적 이슈로 비화됐다.
박근혜 대통령과 정권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는 일은 비일비재하다. 야당 국회의원들은 물론 언론사 기자, 일반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대통령 풍자 만평을 실은 화백이 고발당하는가 하면, 유모차를 끌고 세월호 참사 추모 시위를 했던 엄마들도 고발당했다.
◇ 보수단체 고발→신속한 수사... 공안사건의 새 패턴고발은 특히 공안사건에 집중된다. 민감한 공안사건이 보수단체의 고발로 접수되면, 검찰이 기다렸다는 듯 신속하게 수사에 착수하는 패턴을 보이고 있다.
통합진보당 해산 결정이 내려진 지난해 12월 19일 이후, 경쟁적으로 고발장이 접수됐다. 활빈단, 엄마부대 등 보수단체들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의 혐의로 통진당 당원 전원을 고발했다. 이들과 야권연대를 했다는 이유로 새정치민주연합 한명숙 의원 등도 함께 고발당했다. 검찰은 이후 신속하게 사건을 배당하며 본격적인 수사를 벌이고 있다.
'황선 신은미의 종북콘서트 사건'은 고발과 공안 수사의 긴밀한 연결관계를 잘 보여준다. 지난해 12월 10일 전북 익산에서 열린 토크콘서트 도중 극우 인터넷 커뮤니티 '일베'(일간베스트)에 심취한 고등학생이 황산 테러를 저질렀다.
하지만 테러 피해자였던 황선, 신은미씨는 역으로 보수단체 고발 접수를 계기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와 관련한 검찰의 집중 수사를 받았다. 결국 테러 사건이 발생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재미교포 신은미씨는 강제 출국 조치를 당했고, 황선씨는 구속됐다.
이같은 패턴 때문에 검찰이 공안사건 수사 과정에서 보수단체의 고발을 적극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초동에서는 "'간첩'을 빼면 나머지 공안 사건은 보수단체 고발로 먹고산다"는 자조섞인 말이 나온다. 보수단체 고발은 무리한 공안 수사라는 여론의 방패막이로 작용하기도 한다.
이호중 서강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검찰이 점차 정치적인 사건이나 공안사건 등을 다룰 때 고소고발을 역으로 이용하는 면이 두드러지고 있다"면서 "현 정권 들어 검찰에 대한 장악력이 커진 것과도 연관이 있다"고 분석했다.
청와대 자료사진. (황진환 기자)
◇ 청와대도 뛰어든 고소고발전... 정권에 오히려 독(毒)되기도보수단체에 이어 청와대도 고소고발에 한 몫하고 있다. 김기춘 비서실장은 비판적인 기사를 쓴 언론사들을 매번 직접 고소하면서 '고소왕'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칭이 붙었다.
정윤회씨 문건 파동도 청와대의 직접 고소로 서초동으로 넘어왔다. 검찰 수사를 통해 비선라인의 국정개입 의혹을 해소하겠다는 취지였지만 오히려 반작용이 컸다. 여론은 '가이드라인 논란' 등으로 검찰 수사를 신뢰하지 못했고, 권력의 속살이 드러나면서 박근혜정부 지지율 하락의 원인이 됐다. 섣부른 고소가 독이 된 셈이다.
{RELNEWS:right}청와대 고소고발은 검찰 조직에도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분야까지 검찰에 내려보내는 것에 대한 검찰 내부 불만은 상당하다.
한 검찰 고위 관계자는 "서초동을 흔히들 '쓰레기 처리장'이라고 비유하는데, 이제는 쓰레기가 아닌 것들까지 모두 검찰로 넘어오고 있다. 정치, 사회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풀어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넘어와서 쓰레기가 되고 있다"고 비판했다.
고소고발전에 휘둘리느라 비리 척결 등 검찰 본연의 기능이 약화되고 있다는 위기의식도 있다.
한 부장검사는 "권력층 비리 등 인지수사가 기본이 돼야 하는데 요즘은 고소고발건을 처리를 하느라 수사력이 다 소진되는 것 같다. 오죽하면 특수부보다는 명예훼손을 담당하는 형사부가 더 중요해졌다는 얘기가 나오겠느냐"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