뮤지컬 '영웅' 하얼빈 공연. (제공 에이콤인터내셔날)
동양 평화를 꿈꿨던 도마 안중근(1879~1910)의 정신이 중국 하얼빈에서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안중근 의사가 대한 독립을 꿈꾸며 이토 히로부미 저격하고 순국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국내 창작 뮤지컬 ‘영웅’(에이콤인터내셔날)이 7일 오후 유서 깊은 땅 하얼빈에서 공연된 것.
중국 정부가 지난해 1월 하얼빈 기차역에 개관한 안중근 기념관 1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무대이다.
게다가 올해는 안중근 의사 의거 106주년, 순국 105주년을 맞는 해이고 광복 70주년을 맞아 역사적 의미가 더해졌다.
공연은 7일과 8일 양일간 세 차례 무대에 오른다. 7일 오후 첫 공연을 앞두고 하얼빈 환구극장에는 뮤지컬 '영웅'을 보려고 찾아온 중국 관객들로 가득했다.
공연 전부터 티켓은 거의 매진됐지만 갑자기 기온이 영하 20도로 떨어지고 눈발까지 날리며 관객들이 오지 않을까 염려가 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최대 1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환구극장의 일부 객석을 제외하고는 관객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에이콤인터내셔날 제공)
◇ 휴대전화 켜고, 떠들던 중국 관객들 어느새 극에 몰입중국 관객에게 뮤지컬은 사실 낯선 장르이다.
그나마 북경과 상해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어느 정도 자리 잡았지만, 경극과 같이 밝은 환경에서 먹고 마시면서 이야기하며 관람하는 문화가 익숙한 중국인들에게 불이 꺼진 채 조용히 앞만 보기란 어색하기만 하다.
하얼빈도 인구 1000만이 넘는 도시이고, 세계적인 클래식 축제가 열리는 음악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지만 뮤지컬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공연이 시작하자 휴대전화로 플래시를 터트리며 사진을 찍고, 동영상 촬영하고, 옆 사람과 큰 소리로 이야기하는 모습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현상도 잠시. 배우들의 열정적인 연기와 노래, 칼 같은 안무 그리고 거대한 무대장치 등은 중국 관객들을 극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공연은 한국어로 진행됐지만 양 옆 스크린으로 중국어 자막이 나왔다. 중국 관객을 위한 특별한 시간도 있었다. 등장인물 중 중국인 남매 '왕웨이'(장대웅 분)와 '링링'(이수빈 분)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의 일부 대사는 중국어로 했다.
중국인 장쉬엔(25.여) 씨는 "발음을 완전히 알아듣기는 힘들었지만 하얼빈 시민을 위해 노력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고 평했다.
중국어보다 극중 등장하는 ‘하얼빈’ 대사에 더 신기해하는 반응이 쏟아졌다. 공연 중 배우들이 “하얼빈”이라는 대사를 뱉으면, 객석 곳곳에서 “하얼빈” “하얼빈” 하며 옆 사람과 대화하는 소리가 크게 들리곤 했다.
절정은 안중근 의사(강태을 분)가 일곱 발의 총탄으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뒤 '대한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는 장면이었다. 객석에서는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공연이 종료된 뒤 커튼콜에서 안중근 의사로 열연한 강태을 배우가 등장하자 관객들은 기립해 박수를 보냈다.
뮤지컬 '영웅' 하얼빈 공연. (제공 = 에이콤인터내셔날)
◇ “안중근 이름은 들어봤지만…다시 보게 됐다”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친다는 멍셩아이(30·여) 씨는 공연 후 "안중근 의사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자세히 몰랐다. 오늘 공연으로 그가 조선 독립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는 것을 깊이 이해하게 됐고 감동받았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어 "한국 배우들의 연기와 표현도 훌륭했다. 이렇게 수준 높은 뮤지컬을 본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회사원 장줘어(59) 씨는 "안중근 의사는 위대한 영웅이라고만 알고 있었지 상세한 것은 몰랐는데, 조국을 위해 목숨 바쳐 독립운동을 한 것이 존경스럽고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하얼빈공대 교수인 순빙(46)은 "한때 사람들이 저렇게 평화에 대해 갈망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새살 깨달았다"면서 "군국주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날 공연을 보러 온 류싱밍 하얼빈 정무 부비서장은 “안중근은 하얼빈 시민이 모두 알고 있는 영웅이다. 하지만 뮤지컬 ‘영웅’을 통해서 우리 모두가 안중근은 다시 보게 됐다”고 감격스러워했다. 이어 “예술적, 문화적, 역사적으로 훌륭한 공연이라고 생각한다”고 평가했다.
◇ 윤호진 대표 “독립운동 하는 마음으로”이처럼 공연의 감동을 중국인들에게 고스란히 전할 수 있던 까닭은 제작진들의 헌신적인 노고 덕이다.
그동안 국내 뮤지컬의 중국 공연은 기간이 짧아 한국에서 진행될 때보다 무대 연출을 최소한의 형태로 진행해 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겨우 이틀간 단 세 차례 공연이지만 완성도를 높은 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모든 장비와 무대를 한국에서 들고 왔다.
에이콤인터내셔날 황보성 경영부문 대표 프로듀서는 “40t 대형 컨테이너 5개 분량을 인천에서 중국 다롄까지 배로 옮긴 뒤 기차로 하얼빈까지 실어 날랐다. 배우 36명과 스태프 등 공연팀도 100명에 이른다”고 전했다.
힘들게 소품들을 가져왔지만 무대 설치는 쉽지 않았다. 환구극장 무대 상황 공연을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본래 회의장이라 무대 시스템이 복잡한 '영웅'을 공연하기에 무리가 따랐다.
박동우 무대디자이너는 “하얼빈 공연 1번 준비하는 게 한국에서 3번 공연을 준비하는 것과 같을 정도로 어려운 환경이었다”고 전했다
연출을 맡은 윤호진 에이콤인터내셔날 대표(홍익대 공연예술대학원장)는 "열악한 조건 속에서 정말 처절하게 준비하고 연습했고,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과거 안중근 의사가 독립운동 하던 정신으로 하자고 했다"며 "서울 공연과 거의 다름없을 정도로 하나하나 돼가는 것을 보면서 스태프가 매직(마법)을 쓰는 것 같았다"고 덧붙였다.
이어 윤 대표는 "이번 공연을 계기로 향후 중국어 버전이 새롭게 탄생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며 "하얼빈이 중국 진출의 좋은 전진기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7일 오전 하얼빈 기차역 안중근 의사 기념관에서 한중근 의사 흉상을 바라보고 있는 배우 강태을. (제공 = 에이콤인터내셔날)
배우 강태을은 "역사적 장소에서 하는 공연이다 보니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꿈만 같다"면서 "서울에서 공연할 때보다 무대에서 많이 울컥했다"고 그 심정을 전했다.
'영웅'은 8일 같은 장소에서 2차례 더 공연한뒤 귀국한다. 이어 4월 14일부터 5월 31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 무대에서 8번째 공연을 진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