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원고 교실 입구의 신발장. 3학년 학생들의 신발장은 대부분 이름표도 붙어있지 않은 주인없는 신발장으로 남아있다. (사진=권민철 기자)
세월호 참사의 피해자 하면 보통 목숨을 잃은 304명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일상은 어떨까? 또 숨진 아이들의 형제자매들에게는 또 어떤 고통이 있을까?
지난달 몇 차례 기자가 찾아간 안산 단원고에는 세월호 생존자 75명 가운데 전학간 1명을 뺀 74명이 3학년에 재학중이다.
참사 1년이 지나고 있는 지금 이 학교는 겉보기에 여느 학교와 다르지 않았다.
교실에는 새학기의 설렘과 분주함이 엿보였고 운동장에서는 학생들의 함성이 가득했다.
그러나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불안하다.
교무실이 있는 건물 지하에는 상담실 8개가 운영중이다. 이 곳에 스쿨닥터가 상주하면서 학생들을 돌보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말 생존자 한명이 자살을 시도한데 이어 최근에도 한명이 울다가 실신했다.
생존자 아버지 장동원 씨의 전언이다.
"증상에서 오는 거죠. 워낙 애들이 힘드니까 울다가 탈진을 해버린거지. 그러다 탈진을 해버리면 약한 애들은 기절해 버리잖아요? 그런 거였어요. 자살하고 이런 건 아니었고. 계속 이런게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친구들을 두고 살아나왔다는 자책감 그로 인한 우울증, 또 친구들에 대한 그리움은 생존 학생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심리상태다.
장 씨 역시 딸의 감정기복 때문에 이사를 가야 했다.
"여기 이 아파트 살았다가 이사 갔어요. 저 월피동으로. 왜냐면 얘 친구들이 얘 친한 친구가 다 죽었어요 얘 혼자만 살고. 그러니까 얘도 힘들지. 아침에 학교 갈 때 만나는 애들이 있어요. 그런데 걔들이 다 없으니까. 얼마 전에 처음에 왔을 때는 막 뛰어 들어오더라고. 울면서. 조금 있다가 이사 갔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생존자 가족으로서는 주변의 비뚤어진 시선 때문에 피해사실 자체를 밝히기 힘든 상황이다.
다시 장동원 씨의 얘기다.
"뭐하나만 해도 '니들이 살아나왔음 다지 뭔 얘기를 하냐?' 이런 식으로 얘기해버리면… 댓글도 대부분 그렇잖아요. 애들 뭐 좀 해보려고 하면…"
또 다른 단원고 생존자 아버지인 김동수 씨는 그의 아들이 자기 방에 희생자들 이름표를 모셔놓고 있다고 말했다.
"지가 좋아하는 친구들 이름을 새긴 명찰이 30개 정도가 책상에 있었어요. 어디서 파왔겠죠? 처음에 30개가 있었는데 하나하나 없어지더니 지금은 3개가 남아 있더라구요."
지금은 많이 나아졌다고 하지만 아이가 변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는 게 김 씨의 얘기다.
"밥먹자 하면 엄마한테 '좀 있다 먹을께요' 그러던 녀석이었는데 지금은 '있다 먹을께' 이렇게 모든 게 반항조로 가요. 뭘 하자 그러면 좀 귀찮다고 생각한다던지 안한다던지 뭐 이런 쪽으로. 얼만 전에는 담배를 핀 걸 지 엄마가 발견을 했어요."
그렇다고 부모로서 야단칠 수도 없다.
"더 반항적으로 나갈까봐 말을 못하겠어요. 걔가 어떻게 보면 불쌍한 아이잖아요? 생존해 나오면서 그 짧은 시간이지만은 생사를 오락가락 했을 때에 얼마나 그랬겠어요?"
세월호 때 희생당한 254명의 단원고생의 형제자매들도 걱정되기는 마찬가지다.
유족 김정숙 씨의 말이다.
"큰 아이보다 5살 어린 동생이 있어요. 형이 야자 끝나고 오면 기다렸다가 항상 샤워도 같이 하곤 했었어요. 그런데 형이 죽고 난 다음에 샤워를 안 하더라요. 나중에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물소리만 계속 나서 살짝 문 열고 보니까 물만 틀어놓고 울고 있더라구요…(울음)"
대학생 형제자매들도 지금까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
박은미 씨에게는 실종자 허다윤 양의 언니가 있다. 그런데 며칠 전 큰 딸에게서 문자가 왔다.
"문자를 보니 꿈에 다윤이 때문에 많이 울었다고. 잠을 깨고 일어났는데도 계속 울었다고 하데요. 같이 늘 옆에서 붙어서 같이 싸우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그랬던 동생이 없는데… 근데 제가 이렇게 큰 딸을 보면, 그냥 아예 힘들고 아픈 마음을 이렇게 드러내고 표현을 하면 외려 더 좋을텐데 그걸 감추네요. 그게 더 무섭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