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항공사들이 A380 여객기 등 첨단 항공기와 거대 자본력을 앞세워 국내 국적항공사들이 운항중인 유럽 노선 등에 대한 운항 횟수 확대 움직임을 가시화하고 있다.
정부가 중동항공사들의 요구를 타 산업과의 '딜' 형식으로 무차별 수용할 경우 국내 항공산업은 회복 불능의 치명타를 입을 것이란 지적이 커지고 있다.
31일 관련 업계 등에 따르면 에미레이트항공, 에티하드항공, 카타르 항공 등 중동 항공사들은 인천을 출발해 아부다비, 도하, 두바이를 거치는 다양한 유럽 환승 노선을 운항중이다.
중동항공사의 유럽 노선은 직항인 우리 국적기나 유럽 외항사와 달리 중동 지역을 경유해야하기 때문에 비행시간은 길지만 저렴한 가격을 무기로 국적 항공사들을 위협하고 있다.
항공사 '아랍에미레이트' A380 항공기 (아랍에미레이트 홈페이지 캡처)
◇ 중동항공사 A380 등 첨단기종 잇단 도입..국적사 " 탑승률 큰 차.. 현재도 고전"현재 인천~두바이 노선에 취항하고 있는 에미레이트항공의 경우 '하늘 위의 호텔'이라 불리는 첨단 A380 항공기(519석)를 투입해 주 7회 운항하는 반면 국적항공사인 대한항공은 A330 기종(218석)을 투입해 주 7회 운항중이다. 탑승률은 올해 1분기 기준으로 에미레이트 항공은 평균 78%에 달하지만, 대한항공은 59%에 불과하다.
에미레이트항공은 현재 총 61대의 A380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으며 향후 79대를 추가로 도입할 예정이다. 이에 비해 대한항공은 A380을 10대 보유중이며 향후 도입계획은 아직까지 없다.
에티하드항공 단독으로 운항하고 있는 인천~아부다비 노선의 경우에도 공급력면에서 국적기와 현격한 차이를 보이는 등 중동계 항공사들의 독주가 계속되고 있다.
한-아랍에미레이트 양국간 항공협정에 따르면 한국~두바이 노선은 주 8회, 한국~아부다비 노선은 주 7회를 운항할 수 있다. 아랍에미레이트 측은 현재의 양국간 운항 횟수에 만족하지 않고 두바이 노선을 주 14회나 21회까지 대폭 늘려달라고 요구 하고 있다. 이는 두바이나 아부다비를 경유해 유럽, 아프리카 및 중동으로 가려는 한국 승객을 끌어들이려는 데 목적이 있는 것으로 한국 항공업계는 파악하고 있다.
현재 한국은 15회의 공급력 중 주 7회만 사용하고 있으나, 아랍에미레이트 측 항공사는 주 14회를 운항하며 중동에서 연결되는 다양한 이원 노선망을 이용해 우리 국적 항공사의 수요를 잠식하고 있다.
(대한항공 제공)
실제로 양국 항공사의 올해 1분기 탑승률을 보면 대한항공이 59%, 아랍에미레이트 측 항공사가 78%로 약 19%의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인천공항을 허브로 운항하는 대한항공이 양국 직항 승객 위주로 운항을 할 수 밖에 없는 반면 아랍에미레이트 항공사는 자국 경유 유럽 등 대부분 환승 수요 승객을 대상으로 운항하는데 따른 결과다.
특히 양국 항공사의 수요를 살펴보면 우리나라 국적 항공사의 경우 한국~두바이 노선 수요의 약 2/3가 두바이로 가는 직항 수요인데 반해, 아랍에미레이트측 항공사들 수요의 대부분이 두바이, 아부다비를 거쳐 유럽, 아프리카 및 중동으로 가는 환승 수요다.
◇ 국적사들 "중동항공사 요구 수용하면 경영 심각한 타격"..하늘길 넓혀준 외국은?항공업계 관계자는 "아랍에미레이트 측에서 요구한 운항횟수 증대를 받아들이면 향후 심각한 공급 불균형 뿐 아니라, 우리 국적 항공사의 유럽, 아프리카, 중동행 수요를 상당 부분 잠식하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중동계 항공사들이 항공산업을 잠식한 외국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유럽과 대양주를 잇는 허브 공항이었던 싱가포르 창이공항은 중동계 항공사들의 거센 공격에 밀려 2인자로 추락했고, 중동계 항공사들에게 잇따라 하늘길을 열어줬던 싱가포르, 호주, 독일, 영국 및 프랑스는 국적 항공사들이 심각한 타격을 입고 자국 항공 시장을 잠식당했다.
항공업계의 다른 관계자는 “한국과 아랍에미레이트의 운항횟수가 늘어나게 되면 중동계 항공사들이 싱가포르, 호주, 독일, 영국 및 프랑스에서 항공시장을 잠식했던 것과 같은 상황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며 "이렇게 되면 인천공항의 허브 공항으로서의 경쟁력 또한 약화될 게 뻔하다"고 말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3월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 세인트레지스 호텔에서 열린 한-UAE 비즈니스 포럼에서 참석자와 악수하고 있다. (사진 = 청와대 제공)
거대 자본력을 등에 업은 중동 항공사들은 지난 3월 박근혜 대통령의 중동 순방 당시 한-중동간 노선 운수권 확대를 정식으로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우리 정부가 건설, 자동차산업 등과 항공산업을 엮어 해당 국가와 딜을 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가 예상되면서 항공업계의 고심은 깊어지고 있다.
거대 자본력을 등에 업은 중동 항공사들의 물량공세는 향후 국내 항공시장의 커다란 위협요소가 될 것이라는 게 항공업계 전반의 공통된 시각이다. 실제로 에미레이트항공, 카타르항공 등은 막강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A380 등의 신기재와 값싼 항공권을 앞세워 국내에서 적극적이고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을 펼치고 있다.
◇ 항공업계 "한-중동 운수권 확대는 신중해야" .. 국토부 "결정된 것 없어”항공 업계는 해당 노선의 운수권 확대로 국내 항공사가 얻어낼 실익은 크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오히려 중동 항공사로의 수요 이탈이 심화돼 국내 항공사의 경영 악화 및 인천공항의 동북아 허브공항 구축의 심각한 위협요인이 될 수 있다는게 업계의 분석이다.
항공업계 관계자는 "양 측이 동등한 상업적 기회를 누릴 수 없는 상황인데도 중동항공사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한다고 해서 상대국만 일방적으로 유리한 운항횟수 증대를 합의할 필요는 없다"면서 "운수권은 국가의 재산이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반드시 국익이 최우선적으로 고려돼야 한다"고 말했다.
{RELNEWS:right}이에 대해 정부는 중동 국가들과 관련 논의가 진행중인 것은 없다는 입장이다.
국토부 항공정책 관계자는 “중동항공사들의 해당 노선에 대한 운항횟수 증대 요구는 오래전부터 계속돼 온 사안"이라며 "현재 논의가 진행중인 것은 없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타 산업과의 딜 형식으로 운항 횟수 증대 요구를 받아들일 가능성에 대해 “노선 확대나 운항 횟수 증대 등은 항공회담을 통해 결정되는 것으로 타 산업과 딜을 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국적항공사들의 경영에 어려움이 예상되는 만큼 논의가 진행된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요구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중동항공사들의 운수권 확대 요구는 국내 항공산업에 막대한 타격을 줄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인 만큼 우리 정부가 신중히 접근해야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