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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상금 줬다 되찾아간 국가…"다시 고문실로 돌아간 기분"

인권/복지

    배상금 줬다 되찾아간 국가…"다시 고문실로 돌아간 기분"

    [되살아난 고문, 두번 죽는 이들 ②]

    공안사건의 억울한 피해자들은 최근의 재심을 통해 늦게나마 치유됐을까. 현실 속 그들은 고문 가해자와 다시 맞닥뜨린 트라우마로 충격 속에 세상을 등지기도 했고, 배상 절차의 허점 때문에 또다른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CBS노컷뉴스는 '되살아난 고문, 두번 죽는 이들' 기획을 통해 공안사건 피해자들이 다시 겪는 아픔을 조명한다. [편집자 주]



    인민혁명당 재건위원회(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간첩'의 누명을 쓰고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이창복(77)씨.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민대에서 논리학 강사를 하고 있던 그에게 느닷없이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 요원들이 찾아와 남산 대공분실로 끌고 간 게 1974년도의 일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반유신체제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민청학련'이 공산정권 수립을 기도했다며 180여 명을 잡아들였고, 그 배후 조종 세력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꼽았다.

    인혁당 재건위 핵심 인물로 지목된 이씨는 지하실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했다. 1982년 형집행정지로 석방된 이후에도 불면증과 대인공포, 우울증 때문에 지금까지도 약을 먹지 않으면 잠을 청할 수 없다.

    "예전엔 잠시 볼일을 보러 다녀오면 이웃들이 '김정일 만나고 왔느냐'고 물어봤어요. 하루는 아들과 아침 산책을 하는데 어떤 어린 아이가 '아저씨 빨갱이, 간첩' 하더라구요. 이후로는 아들과 밖에 나갈 수가 없었어요."

    큰아들은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하고 싶었지만, '간첩의 아들'이란 연좌제에 묶여 꿈을 접어야 했다.

    이씨와 그 가족의 삶은 2008년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되고 나서야 비로소 명예를 회복했다.

    이어진 민사소송 1심도 승소해 가지급금으로 10억 원을 받았고, 돈은 그동안의 빚을 청산하고 경기 양평군의 작은 주택을 마련하는 데 사용했다.

    (사진=유튜브 영상 캡처/자료사진)

     



    하지만 평범한 시민이 됐다는 기쁨도 잠시. 대법원에서 배상액이 달라졌다.

    1·2심은 손해배상금의 이자를 손해가 발생한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원심 최종 확정일인 1975년 4월로 기준으로 계산한 반면, 대법원은 민사소송 2심의 변론 종결일을 기준으로 계산했다.

    이에 따라 배상금 총액은 형편없이 깎였고, 오히려 이씨에게 5억 원을 반환하라는 결정이 나왔다. 그의 유일한 재산인 집도 가압류됐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이 우리를 간첩으로 몰아 한번 죽였어요. 그런데 줬던 돈도 빼앗아 가겠다는 건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국격에 맞지 않는 일이죠."

    눈시울이 촉촉해진 이씨는 "돈을 더 받겠다는 흑심이 있는 게 아니다"라며 "나름 양심을 갖고 산 노인을 거리로 내쫓는 잔인한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하며 먼 산만 바라봤다.

    '아람회'라는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혐의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박해전(61)씨의 상황도 마찬가지.

    박씨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에 관한 유인물을 배포했다 연행돼 대전 보문산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짐승 같은 고문의 나날이었죠. '김일성을 위해 죽는다'는 내용의 유서까지 작성하라더군요. 죽음의 문턱을 넘나드는 상황이 계속됐습니다."

     

    그는 유죄를 선고받고 간첩이라는 낙인과 함께 '무덤 없는 주검'으로 살아왔다. 고문에서 살아남았으니 세상에 쓸모있는 사람이 되자고 자기최면을 걸며 악착같이 버텼다.

    결국, 명예회복을 위해 청구한 지 8년만인 2008년 재심이 시작됐고, 사건이 발생한 지 28년 만인 이듬해 5월 무죄가 선고됐다.

    이후 민사소송도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2심에서 20억 원의 배상 판결을 받고, 그중 3분의 1인 7억 원을 가지급금으로 받았다. 모두 어려운 시절 자신을 도왔던 사람들에게 마음의 빚을 갚았다.

    하지만 대법원은 청천벽력 같은 판결을 내렸다. 이씨와 마찬가지로 손해배상금의 이자 계산 기준을 바꿔 최종 배상금이 7억 원으로 확정됐다. 나머지 배상금으로 재단을 만들어 고문 피해자들을 도우려던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형사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 받은 뒤 우리는 사람답게 살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사회정의가 실현됐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대법원의 민사 소송 결과는, 전두환 살인정권의 대공분실이 있던 그 원점으로 되돌려 놨습니다."

    박씨는 공황 상태에 빠졌다. 단지 배상금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대법원이 전례없는 기준까지 만들어 배상액을 깎은 것은, 여전히 과거사에 반성하지 않는 국가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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