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일류 기업로서의 사회적 책임을 보여주느냐, 종지부를 찍을 줄 알았던 8년간의 백혈병 논란을 다시 원점으로 돌리느냐"
삼성전자가 딜레마에 빠졌다. 23일 삼성백혈병 조정위원회의 권고안 때문이다.
조정위 권고안의 핵심은 1000억 기부를 통한 공익법인의 설립과 피해자 보상, 재해예방대책 그리고 사과다. 권고안 수용 여부를 두고 기로에 선 삼성전자는 둘 중 어떠한 선택을 하더라도 손실이 '상당'하다는 게 업계의 목소리다.
전자를 선택하면 '좋은 이미지'는 얻지만 '실속'은 없다. 후자는 반대다. 일단 '실속'은 챙길지언정 '회사를 위해 일하다 숨지거나 병든 직원을 8년째 외면한 회사'라는 주홍글씨가 씌어질 가능성이 크다.
삼성전자는 조정위의 권고안 발표 직후 "오랜 기간 숙고해준 조정위에 감사를 드린다"면서도 "여러 차례에 걸쳐 받아들기 어렵다고 밝힌 내용이 포함돼 고민되는 것이 사실"이라고 입장을 밝혔다.
조정위의 4가지 권고안 가운데 삼성전자가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부분은 공익법인의 '이사회 구성과 권한'이다.
매출 200조인 삼성전자에서 기부금 1000억원은 "피해자와 그 가족의 아픔을 위로할 수만 있다면 지원할 수 있는 금액"이지만 다소 부담스러운 측면도 있다.
삼성을 더 고민하는 것은 출범할 공익법인에 '회사 경영진은 물론 반도체 전문가도 포함되지 않아 재계 측의 입장을 반영할 만한 이사가 단 한 명도 없다'는 것이다.
재계 관계자는 "기부금 액수도 적지 않지만 그보다 이사회 구성과 권한이 제안을 받아 들이는 데 삼성에는 큰 부담이 될수 있다"고 말했다.
조정위가 권고한 공익법인의 발기인은 대한변호사협회, 한국법학교수회, 경실련, 참여연대, 산업보건학회, 한국안전학회, 대한직업환경의학회 등 7곳의 단체로부터 1명씩 추천받아 위촉된다. 발기인은 공익법인 설립 후 공익법인의 이사가 돼 의사결정기관인 이사회를 구성하게 된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이사회에서 배재됐다. 보상 산정 과정에서 삼성전자는 어떠한 관여도 할 수 없는 것이다.
또 삼성전자가 포함되지 않은 공익법인에 사업장 내부점검권을 준 것도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권고안에 따르면 공익법인 이사회가 추천한 옴부즈맨 3명은 삼성전자 사업장의 주요 정보를 들여다볼 수 있고, 필요할 경우 시정을 요구할 수 있다. 이럴 경우 사실상 회사 경영 전반에 대한 간섭 우려가 제기된다.
조정위가 정한 질환과 업무 연관성을 불문한 채 치료비 전액을 보전하라는 권고 역시 현행 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근간을 흔들 우려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피해자 가족들과 반올림(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은 권고안에 대해 구체적인 의견을 밝히지는 않았지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황상기 반올림 교섭 대표는 "자세한 내용은 서류를 면밀히 살핀 후 밝히겠지만 큰 줄기는 상당히 신경을 많이 썼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삼성전자는 오는 31일 전후로 권고안 수용 여부를 발표한다는 방침이다. 초일류 기업으로서, 불리한 점을 감수하고 삼성의 위상에 걸맞는 선택을 할 것인지, 수익을 내야하는 어쩔수 없는 '기업'인 이상 8년간의 노력을 원점으로 돌려 9년째로 접어들게 할 것인지 선택이 주목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