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주년인 올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규군이던 한국광복군 창설 75주년이기도 하다. 대한민국 국군의 전신인 광복군은 구한말 의병과 만주 독립군의 역사를 이어받은 대일 무장항쟁의 주역이었다. CBS는 3회에 걸쳐, 자랑찬 광복군의 명맥이 국군에 제대로 계승됐는지 점검하고 대안을 모색한다.[편집자 주]
광복군은 1945년 일제 패망을 앞둔 시기 미국 전략첩보국(OSS)와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준비했다. 자유프랑스군이 파리 탈환작전에 참여해 프랑스가 승전국 반열에 오른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했다. 그러나 작전 개시 전 일제가 무조건 항복하면서 수포로 돌아갔다.
미군의 전투기와 잠수함 등이 동원돼 광복군의 승리가 가능했던 시점에서 전쟁이 끝나버렸다. 김구 주석의 우려대로, 임시정부와 광복군의 전쟁 기여도가 낮아 독립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란 입지는 좁아졌다. 결과적으로 나라가 분단되고, 임시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부 자격을 인정받지 못했다.
◇ ‘승리의 문턱’까지 갔던 광복군김우전 광복군동지회장은 이 대목을 아프게 기억하고 있다. 그는 “광복군은 1943년 영국군과 인도전선에서 함께 싸웠고, 45년에는 미국과 합작을 한 연합국 일원이었다. 그런데 미국은 (신탁통치로) 독립국 지위를 부인하고 배신했다”고 비판했다.
반면 미군정의 편의주의적 행정과 옹호 속에서 일본군·만주군 출신 친일반민족 행위자들은 착근에 성공했다. 성균관대 서중석 명예교수는 “미군정의 국방경비대는 일본군 출신자가 대다수였고, 48년 국군으로 확대된 뒤에도 군에는 광복군 출신 중령급 이상 고위장교가 열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서 명예교수는 또 “광복군 출신 이범석 초대 국방부 장관이 1949년 3월, 7개월만에 해임되고 난 뒤에 광복군계가 군 내에서 힘을 잃었다”고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우리보다 대규모인 수만명의 병력으로 나치독일과 전면전을 벌인 폴란드 망명정부조차 전후 승전국 지위를 인정받지 못했던 점을 지적한다. 광복군이 진공작전에 성공했어도 폴란드처럼 무시당했을 수 있다는 얘기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이를 항일 독립투쟁을 폄훼하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그는 “한국의 독립을 확약한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그냥 나온 게 아니다. 한반도 내부의 징용거부 투쟁과 파업, 임시정부 등의 무장투쟁과 외교적 노력이 일궈낸 성과”라며 “‘해방은 연합군이 해줬다’는 시각은 정부수립과 독립운동의 연계를 끊어내려는 뉴라이트적 논리”라고 지적했다.
◇ ‘국군의 날’을 9월 17일로
학계는 이같은 광복군의 업적과 한계를 국군이 제대로 계승하기 위해 먼저 국군의 날을 광복군 창설일인 9월 17일로 변경하는 안을 지속적으로 제안해왔다. 시기상 인적 계승이 불가능한 만큼, 선언적 조치로 군의 정신전력을 가다듬자는 얘기다.
단국대 한시준 교수는 “현행 국군의 날은 6·25 때 국군이 38선을 돌파했던 날이라고 한다. 이런 날이 아니라 국군의 생일날, 광복군 창설일로 하는 게 맞다”며 “헌법정신에 비춰볼 때 국군의 시작은 광복군부터로 봐야한다”고 말했다.
국회에서도 한시적으로나마 여기에 동참했다. 16대 국회 때인 2003년, 17대 때인 2006년 각각 ‘국군의 날 기념일 변경 촉구 결의안’이 발의된 바 있다. 하지만 두 결의안 모두 임기만료로 폐기됐다.
한 교수는 김영삼정부 시절 일화를 들어, 국군의 역사인식 부재를 지적했다. 그는 “당시 육사 출신이던 국방부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우리는 일본군 출신들과 다른 세대이고 국군의 정신적 뿌리를 제대로 하고 싶다’면서 국군의 날을 바꾸는 방안을 문의했었다. 하지만 결국 바뀌지는 않더라”고 전했다.
아울러 각군 사관학교를 비롯한 지휘관 양성 과정에서 광복군 관련 정훈교육을 강화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서중석 명예교수는 “특히 육사의 경우 광복군사를 제대로 교육하고, 이회영 선생 등이 창설했던 신흥무관학교를 기원으로 삼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