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황석영씨 (사진=자료사진)
올해 일흔 둘의 원로작가 황석영 씨가 최근 교보빌딩에서 열린 인문학강의에서의 발언으로 시끄러웠다. 이미 알려진 대로 황씨는 한국문학의 침체가 ‘문예창작학과 때문’이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고 그게 화근이 됐다. 문제는 그의(문예창작학과에 대한) 진단이 옳고 그름을 떠나, 우리나라 문단의 원로작가에 대한 후배 문인들과 독자들의 반응 그리고 불편한 예우를 지켜봐야하는 서글픔 그리고 아쉬움이었다.
황씨는 작가로서의 인생역정과 그 동안 발표했던 빼어난 문학작품들만 놓고 보면 한국문단의 소중한 자산임이 분명하다. 존경받을 원로작가여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 현실은 야박하다 못해 냉소적이다. 존경해줄 생각이 전혀 없고, 문단의 어른이라는 자리를 인정해주고 싶은 마음도 없어 보인다. 어디 황씨 뿐이겠는가. ‘창비’ 편집인 백낙청 교수는 신경숙과 문단권력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 존경을 받아 마땅한 일흔 일곱의 나이에 어른 대접은커녕 지청구를 들어야 했다. 역사소설의 제목만 들어도 이름을 떠올리게 되는 C소설가, 유신독재시절 민주화의 상징이었던 K시인 등 누가 보아도 문단은 물론 대한민국 문화예술계, 나아가 국민들로부터 존경받는 원로로 자리 잡고 있어야 할 분들이 원로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한국문단에는 왜 ‘존경받는 어른’이 없는 것일까.
“어떤 사람은 이미 25세에 죽었는데 장례식은 75세에 치른다”고 말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25세에 빛나는 영혼의 성장이 멈춰버린 사람이 75세가 되어서도 25세 때의 영화에 기대어 살려고 하는 노욕을 꿰뚫고 있었던 것 같다. 75세가 되어서도 25세 때의 영혼을 소유한 사람만이 존경받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 같다.
하긴 어른 노릇하기가 어디 그리 쉽겠는가. 자기가 속해 있는 분야에서 탁월한 업적을 이룬 것은 기본이고 삶의 현장 속에서 언행이 일치해야 할 뿐더러 인격적으로 결함이 없어야 한다. 말 한마디를 해도 가려 할 줄 알고, 후배들을 배려하고 격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게다가 때로는 후배들에게 충고와 따끔한 비판도 서슴지 않아야 한다. 나이가 들어도 변절하지 않고 자기 정체성과 도덕성을 유지해야 한다.
예전에는 우리 사회에 ‘존경받는 어른’들이 많았다. 갑론을박하다가도 어른의 한마디에 수긍하며 일을 수습하는 미덕이 있었다. 지금은 그런 미덕이 사라졌다. ‘존경받는 어른’도 사라졌지만, 자칭 ‘원로’라고 하는 사람 중에는 안타깝게도 오히려 후배들이 걱정해야하는 인물도 있다. 비단 문화예술계의 일이겠는가? 사회 각 분야에 나이 든 원로들은 부지기수지만 이들 중 ‘존경받을 만한 어른’이 없다는 것이 문제다. ‘어른 같은 어른’이 없는 사회, ‘어른 같은 어른’이 없는 나라는 불행하다.
‘어른다운 어른’이 없는 것도 문제지만 어른을 만들려고도, 인정하려고도 않는 사회 풍토도 문제다. 원로들에 대한 비난과 깎아내리기, 흠집 내기만 성행한다. 원로들의 원로답지 못한 행태가 일차적인 원인이기도 하지만, 이 시대 진정한 어른을 찾아 그의 권위를 인정해 주고 존중해 주면서 고언을 듣고자 하는 성숙한 자세가 사라진 것이 더 큰 문제라는 것은 왜 모를까.
{RELNEWS:right}일본의 재벌이자 청소의 달인으로 유명한 카기야마 슈우사부로(鍵山 秀三郞)는 ‘존경받는 어른’의 소중한 가치를 일찍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는 “존경하는 사람이 없어졌을 때부터 진보는 없다”고 단정했다.
존경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사람을 본받으려 노력하게 되고 삶의 태도가 나은 방향으로 바뀌게 되지만, 존경하는 사람이 없으면 겸허와 향상심이 없어지고 타인과 사회를 위하기는커녕 교만해지는 게 당연하다. 그래서 카기야마 슈우사부로는 누군가에게 존경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 사람은 진보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는 말할 것도 없고 종교계와 정치 경제 분야에서 ‘존경받는 어른’이 사라진 것은 크나큰 손실이다. ‘존경하고 싶은 어른’이 없는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 두렵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다. 어른의 쓴 소리를 듣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