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자료사진)
밤마다 아파트 주변 산길을 40여분 걷는다.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흙먼지가 푸석푸석 일어난다. 산길 주변의 개나리와 들국화, 쑥부쟁이, 방아풀 등의 말라비틀어진 잎을 매일 본다. 가뭄이 예사롭지 않은 2015년 가을이다.
문득 내년 봄 한반도가 위기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의 핵 도발과 국지전 같은 위험 때문도 아니고 미국 금리인하로 인한 국가 재정위기 때문도 아니다. 그런 중차대한 것 말고 또 무엇이 대한민국을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느냐고 묻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위기의 주범이 ‘가뭄’이라고 하면 “나 원 참” 하고 싱거운 소리를 한다며 콧방귀를 뀔 것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가뭄’을 두려워하지 않게 됐는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1970년대 산업화와 함께 전국 주요 강에 댐을 건설하고부터 가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우수기 때 물을 가득 채워 두었다가, 겨울을 지나 이듬해 봄이 올 때까지 식수와 농공업 용수로 공급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급할 경우에는 수백 미터 깊이에 관정을 뚫어 지하수를 퍼 올릴 수 있으니, 마침내 인간이 물을 정복하고 지배하게 되었다고 자만해졌는지 모르겠다.
문제는 그 둘 다 적정량의 비가 한반도에 내려야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연간 평균 강수량은 1천277mm. 평균 강수량만큼의 비가 내려야 댐에 충분한 물을 저장해, 물 걱정 없이 살 수 있다. 그런데 작금의 상황은 그게 아니다. 올 들어 10월초까지 내린 비는 754mm다. 연평균 강수량의 63%에 그친 양이다. 서울 경기와 충남, 강원, 충북의 경우 50% 남짓으로 더 심각하다.
강수량이 반 토막 나다 보니 댐과 저수지 평균 저수율이 최악의 수준까지 내려갔다. 충남 보령댐의 저수율은 22%로 비상사태다. 이 댐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는 8개 시·군은 이미 제한급수에 들어갔다. 22%의 저수율이 0%로 떨어지면 주민들은 생명수가 끊기는 위기에 직면하게 된다. 그런데 0% 저수율이 현실화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10월 이후 한반도는 기상학적으로 비가 적어진다. 겨울을 지나 봄이 오기까지 바닥 난 댐을 채울 만큼 큰 비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대전과 충남북 지역의 식수와 공업용수를 공급하는 대청댐 저수율도 36%로 위기상황이다. 내년 봄 쯤 저수율이 10% 이하로 내려갈 게 뻔하다. 소양강댐 44%, 화천댐 45%, 충주댐 41%로 저수율이 절반에도 못 미친다. 서울시민의 식수로 쓰이는 팔당댐은 저수율이 90%라지만, 상류인 소양강댐과 화천댐에서 흘러 보냈기 때문이다.
홍성군 서부면에서 콩 농사를 짓고 있는 이해균씨, 이씨가 보여준 콩 밭은 새까맣게 타들어가고 있었다. (사진=정세영 기자)
농민들은 가을가뭄으로 농작물이 타격을 입고 있다고 말한다. 더 무서운 것은 내년 봄이다. 농업용수가 가장 필요한 시기에 물이 없어 파종도, 모내기도 할 수 없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도시 소비자들은 농산물 가격 폭등으로 가계부담을 떠않게 되고, 산업체들은 댐의 전력생산이 중단되면 제한 송전 등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게 된다. 게다가 용수까지 공급이 중단되면 공장가동도 멈출 수밖에 없다. 가뭄으로 물이 부족해지면 정치 경제 사회 안보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런데도 정부와 국회는 ‘가뭄’에 미온적이다. 인간의 생사가 걸린 가뭄과 홍수 등 기상이변에 너무나 무감각하다. 내년 봄 발발할지 모르는 ‘가뭄전쟁’의 전운이 이미 감돌고 있지만 정치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다. ‘공천 룰을 둘러싼 전쟁’에다가 ‘국정교과서 이념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하느냐를 두고 골머리를 썩이고 있다. 팔당댐 저수율이 0%가 되어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과 청와대에 식수공급이 중단되고, 시민들이 청와대와 국회로 몰려가 ‘물을 달라!’고 절규하기 전까지는 ‘가뭄전쟁’에 출전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