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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파리 하늘엔 '관용' vs 서울 하늘엔 '증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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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칼럼] 파리 하늘엔 '관용' vs 서울 하늘엔 '증오'

    프랑스 파리에서 IS에 의해 자행된 연쇄 테러로 120명 이상이 사망한지 이틀이 지난 지난 16일 서울 서대문구 주한프랑스대사관 앞에서 한 프랑스인이 희생자들을 애도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세느강과 한강의 차이는 무엇일까?

    17일(현지시간) 극악무도한 테러를 당한 파리의 하늘엔 평화의 노래가 울려퍼졌다. 반면 폭력 시위를 겪은 서울엔 증오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한강과 세느강의 넓이만큼이나 간극이 벌여졌다.

    프랑스 국민들은 상처를 치유하고자 파리 레퓌블리크 광장에 모였다. 평화를 염원하는 풍등을 날리는 등 사랑을 향한 축제를 벌였다. 파리시 살페트리에르 국립병원에 설치된 헌혈센터에는 20-30대 젊은이들이 넘쳤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이라고 말한다. 평화대회는 질서 정연했다. 물론 한쪽에서는 응징의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무슬림들에 대한 반감과 분노가 강해졌다고 한다. 지난 1월 샤를리 에브도 테러 때와는 분위기가 상당히 다르다고 전해진다.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한 추모객들은 올랑드 정부의 IS 응징과는 별개로 그래도 ‘톨레랑스’를 외쳤다.

    유럽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프랑스 파리의 테러는 2001년 미국의 심장부인 뉴욕과 워싱턴을 강타한 9.11테러에 비견된다. 그럼에도 전례없이 차분하고 프랑스답다는 말이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지난 14일 서울 광화문 일대에서 열린 민중총궐기대회에서 캡사이신을 섞은 물대포를 직격으로 맞아 아스팔트에 머리를 부딪혀 정신을 잃고 쓰러진 전남 보성군 농민회 소속 백 모(69)씨를 옮기려는 시위대를 향해 경찰이 물대포를 다시 분사하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

     

    같은 날인 지난 13일 서울의 한복판에서는 물대포와 각목 등이 난무했다. 폭력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경찰은 차벽으로 대응했고, 집회 참가자들은 차벽을 뚫기 위한 각목과 사다리를 동원했다. 폭력 시위로 얼룩졌다. 60대 농민 한 명이 중태에 빠졌고, 경찰관 두 명이 중상을 입었다. 양측의 부상자도 속출했다. 경찰 부상자만도 113명이며 경찰차량 50대가 파손됐다고 강신명 경찰청장은 밝혔다. 시위 가담자 6명이 폭력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

    폭력 시위의 후유증이 이쯤에서 그치지 않을 것 같다. 경찰과 검찰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폭력 시위를 근절하겠다며 엄정한 사법처리를 다짐했다. 한상균 민주노총위원장에 대한 검거조를 편성해 조계사를 포위하고 있다.

    국무총리가 경찰병원을 방문해 폭력 시위 가담자들에 대한 강력한 대응을 천명하는가 하면 여당은 지난 주말의 민주노총 집회를 테러로 규정했다. 김무성 대표는 18일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 참석해 "의경도 누군가의 아들이자 형제인데 남의 집 아들인 의경을 쇠파이프로 내려치는 이유가 무엇이냐"면서 "지난 주말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폭력은 공권력에 대한 테러라고 명백히 규정한다"고 밝혔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18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최고중진연석회의에서 지난 14일 도심 집회와 관련 발언을 하고 있다. (사진=윤창원 기자)

     

    김 대표의 말처럼 집회 현장에 밧줄과 파이프가 등장하고 경찰이 설치한 경찰차벽을 부순 것은 폭력시위로 볼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다. 노동 운동이 가장 활발한 지난 1989년과 90년대 초반도 아니고 2015년 세밑이 임박한 시점에 이런 시위가 서울광장과 광화문 부근에서 벌어졌다는 건 국가적으로도 수치스러운 일이다. 서울광장과 광화문 광장은 외국인 관광객들의 주요 관광 코스이기도 하다. 특히 13일은 서울 시내 10여개 대학의 논술고사가 치러진 날이었다. 서울 시내가 교통지옥을 방불케 한 날이기도 했다. 시민 불편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주동자들을 사법처리하고 집회를 불허한다고 폭력시위가 사라질까? 정부와 사법 당국은 폭력시위를 벌인 주동자들을 사법처리 하여 법의 응징을 받도록 하는 것이 법치주의에 합당한 일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의 민주화 역사와 전례는 결코 아니라는 답을 내린다. 박정희 정권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도 없이 권위주의 정부들은 늘 법 만능주의에 빠져 ‘일벌백계’를 부르짖었다. 주동자들에 대한 본보기 처벌로 또 다른 폭력을 막는다는 방침을 밝히고 시위 주동 학생들과 노동자들을 무수히 구속했으나 폭력시위는 근절되지 않았다.

    지난 2008년 촛불집회·시위 때부터 폭력시위가 도지기 시작한 것을 보면 정권의 속성과 폭력시위와는 상호 정비례하는 것 같기도 하다. 반대와 탄압이 반복되는 양상이다. 국가 공권력의 도전이라거나 테러라는 극단적인 용어를 써가며 몰아세워선 결코 멈추게 할 수 없다. 한쪽은 그들이 그렇게 막다른 길로 향하는 이유를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은 채 적대시하고, 다른 쪽은 ‘정권의 공안몰이’라고 일도양단해 버리면 문제는 풀리지 않을뿐더러 극단적 대결의 골은 더 깊게 패인다. 국력의 낭비와 소모적인 정쟁.대결은 피할 수 없다.

    폭력 시위는 언제 없어졌을까?라는 의문을 갖는 것은 당연하다. 현 정부·여당은 달가워하지 않을지라도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에서였다. 진보 성향의 정권이 들어섰기에 그들끼리 짝짜꿍이 된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재야·시민·노동 단체들이 정권의 버팀목 역할을 했지 않았느냐고 반격할 수 있으나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그들과 끊임없는 소통과 대화를 했다. 작금엔 그런 소통이 없다. 노사정위원회도 민주노총을 배제했다. 민노총이 참여를 거부했을지라도 민노총을 제도권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제도권 밖으로 내쫓으면 그들이 갈 곳은 집회·시위 현장이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목과 쇠파이프를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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