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마닐라 APEC 정상회의는 역내 정치 경제 질서의 주도권을 놓고 미국과 중국 두 회원국이 벌이는 패권 경쟁의 무대로 기능했다.
남중국해 영유권 문제로 대립하는 미국과 중국은 APEC 정상회의 외교 무대에서 역내 경제 통합 주도권을 놓고도 맞붙었다. APEC 21개 회원국이 참여하는 FTAAP(아태자유무역지대) 구상 실현을 둘러싼 주도권 경쟁이다.
◇ 중국 주도의 FTAAP 구상 그동안 FTAAP(아태자유무역지대) 구상의 추진을 주도해온 것은 중국였다.
중국 시진핑 주석은 지난 2013년 미국 셧다운 사태로 오바마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은 인도네시아 발리 APEC 정상회의에서 "개방과 포용 정신으로 아태 자유무역지대를 건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리바오둥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FTAAP에 대한 행동에 들어갈 때"라고 말하는 등 중국이 FTAAP를 주도하는 양상이 강해졌다.
여기에다 중국은 APEC 회원국 중 12개국(중국, 한국, 일본, 태국, 필리핀, 인도네시아, 상가포르, 말레이사아, 베트남, 브루나이, 호주, 뉴질랜드)을 참석시키고, 라오스· 캄보디아·미얀마·인도를 포함하는 RCEP(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을 추진함으로써 역내 경제 통합의 주도권을 더욱 다져나갔다.
◇ 미국의 대응, TPP 회원국 모여라 그러나 중국이 만들어가는 경제 질서를 그대로 지켜볼 미국이 아니었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10월 TPP 협상 타결 후 낸 성명을 통해 "세계 경제 질서는 중국이 아닌 미국이 주도해야 한다"고 말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오바마 대통령은 마닐라 APEC 정상회의 기간인 18일 APEC 회원국 중 12개국(미국, 캐나다, 멕시코, 칠레, 페루, 일본, 상가포르, 말레이시아, 베트남, 브루나이, 호주, 뉴질랜드) 정상들과 별도 모임을 가졌다. 바로 미국이 주도하는 TPP에 참여한 나라들이다.
12개국 간에 TPP의 조기 발효를 위해 각국의 국내 승인 절차를 서두르자는 합의가 나왔는데, 기본적으로 중국 주도를 견제하기 위해 세과시를 한 셈이다.
오마바 대통령이 APEC 회원국 중 TPP 가입국을 핵으로 중국에 의해 주도되는 FTAAP(아태자유무역지대) 구상 추진을 잠식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것으로 풀이된다.
◇ 미·중 경쟁의 절충, APEC 정상 선언문이처럼 미국 양국이 역내 경제 통합 주도권을 놓고 서로 목소리를 높임에 따라 필리핀 마닐라 APEC 정상회의의 공동선언문도 미·중 양국의 입장이 모두 반영되는 등 절충적 형태로 정리됐다.
APEC 정상들은 선언문에서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의 궁극적 실현을 위한 우리의 약속을 재확인한다"며 "TPP 협상 타결을 포함하여 최근 역내 자유무역협정 진전과 FTAAP을 향한 가능한 경로들의 성과를 확인하며, RCEP 협상의 조기 완료를 독려한다"고 밝혔다.
즉 FTAAP(아태자유무역지대)를 계속 추진해나가되, 미국 주도의 TPP 협상 타결도, 중국 주도의 RCEP 협상도 아태자유무역지대(FTAAP)를 향한 경로로 모두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 박 대통령, '선'을 넘지 않는 신중외교 역내 경제 질서를 주조하려는 미국과 중국의 경쟁 속에 박근혜 대통령의 외교 행보도 미중 양국간 균형 잡기에 고심하는 등 매우 신중한 양상을 보였다.
한 예로 박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주석 등 4개국 정상이 60분간 토론을 벌인 18일 'ABAC과의 대화' 소그룹 토론에서, 시 주석이 FTAAP의 실현에 속도를 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지만, 박 대통령은 당초 전망과 달리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아예 FTAAP(아태자유무역지대)의 중국 주도성을 부인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이어 19일 APEC 정상회의 제1세션에서는 "최근 역내 12개 회원국이 참여한 TPP 타결은 큰 의미가 있으며 현재 진행 중인 한·일·중 FTA와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협상도 원활히 진행되도록 함께 노력해 가야 할 것"이라면서 "이런 다양한 형태의 아태 역내 통합 노력이 아·태 자유무역지대(FTAAP) 실현으로 연결되고, 이 과정에서 개방적 지역주의와 포용적 경제성장이 함께 확보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밝혔다.
박 대통령은 TPP나 RCEP, FTAAP 등을 미중간 대립 이슈가 아니라 역내 경제 통합을 가속화는 수단이나 경로로 파악해야 생산적인 논의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한 것으로 보이지만, 한편으로는 미·중 양국의 입장을 골고루 반영한 공동 선언문의 중립적 맥락에 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른바 '선'을 넘지 않는 신중 외교로 관측된다. 정치 안보만이 아니라 경제 문제를 놓고도 이른바 박근혜 대통령의 균형 외교가 처한 미묘한 딜레마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 2025년 APEC 유치, 가교 역할 확대 기회
한국은 다만 2025년 APEC 정상회의를 유치함으로써 미국과 중국 간에, 선진국과 후진국간에 중간자적 존재로서 가교 역할을 한다는 명분으로 외교 역량을 확대할 공간을 확보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한편 박 대통령은 20일 아세안+3(한·중·일) 정상회의, 동아시아정상회의(EAS) 참석을 위해 말레이시아로 출국한다. 박 대통령은 21일 아세안+3 정상회의에 참석해, 경제·금융·과학 분야의 성과를 점검하고 향후 협력 방안을 논의할 전망이다.
◇ 박 대통령, 반기문 총장 만날까? 22일 열리는 아시아정상회의(EAS)에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참석하는 만큼 박 대통령과 만난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반 총장의 북한 방문 일정 등에 대한 대화가 오갈지도 관심을 모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