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BS노컷뉴스가 2015년의 끄트머리에서 올 한 해 문화·연예계를 달군 굵직한 사건들을 되짚어 보는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차곡차곡 모아 온 관련 자료와 정교한 시선으로 사건의 현재와 흥미로운 뒷이야기를 전합니다. [편집자 주]글 싣는 순서 |
① 유병재·최민수·김미화와 함께 기록한 '세월호 1주기 ② 승자 없는 서울시향 사태, 남은 건 언론의 마녀사냥 (계속) |
지난해 연말 벌어진 소위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 사태’가 다시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다. 최근 경찰이 ‘박현정 전 대표 무혐의’로 결론짓고, ‘성추행 주장 K직원에 대해 구속영장 청구’를 하면서부터다.
이것만 보면 상황이 달라진 것은 맞다. 하지만 당시 박 전 대표를 마녀사냥 하듯 물어뜯던 언론이, 그에 대한 반성도 없이 이번에는 서울시향 직원들을 공격하는 모양새는 의아하다.
언론의 보도는 마치 흙탕물 속에서 물을 더욱 휘젓는 것 같다. 사건 속에 숨겨진 진실이라는 물고기를 잡기보다, 물을 더욱 흐리는 데 일조하고 있다. 물론 본지 역시 이 지적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 물고 뜯고 즐기던 언론, 국민 성추행범을 만들다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이사. (사진=윤성호 기자/노컷뉴스)
지난해 12월 서울시향 직원 17명이 익명으로 호소문을 발표하면서 서울시향 사태가 언론에 보도됐다. 직원들은 박 전 대표의 막말, 성희롱, 인사전횡 등을 고발하며 공개적으로 퇴진을 요구했다.
당시 ‘성추행녀’, ‘막말녀’ 등 자극적인 제목의 기사가 셀 수도 없이 나왔다. 서울시의회 한 의원에 따르면, 160여 매체가 3000여 기사를 쏟아냈다. 이 내용이 실린 블로그도 500여 개라고 한다.
그럴 법도 했다. ‘여성 대표의 남직원 성추행’, 이것만큼 언론이 물어뜯기 좋은 표현은 없었다. 언론의 보도로,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는 사실상 ‘국민 성추행범’이 됐다.
박 전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혐의를 부인하고, 오히려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명훈 예술감독의 배후설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 주장을 언론은 본질을 호도하려는 수법으로 보았다. 기사에 박 전 대표의 해명을 반영한다 하더라도, 이는 이미 확정(?)된 ‘성추행·폭언 사실’에 대해 기계적 중립을 지키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여기에 서울시 인권보호센터의 결정문은 박 전 대표의 혐의를 사실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인권보호관은 박 전 대표의 성희롱과 상습적인 언어폭력, 직원들에 대한 괴롭힘이 ‘사실로 밝혀졌다’고 발표했다.
거세진 여론의 압박에 박 전 대표는 스스로 물러났다. 그가 떠나며 남긴 한 마디는 “진실은 언젠가 밝혀질 것으로 믿고 있다”였다. 그는 결백을 거듭 주장했다.
박 전 대표의 사퇴로 소위 ‘서울시향 사태’는 그렇게 마무리되는 것 같았다. 정명훈 예술감독의 감사 건이 남은 상황이었지만 당시로서는 별개의 건이었다. 이 과정이 지난해 12월, 한 달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 박현정 전 대표 “사회적으로 매장당했다”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박현정 당시 서울시향 대표이사가 서울시향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대표이사직 사퇴 의사를 밝힌 후 나서고 있다. (사진=윤성호 기자/노컷뉴스)
최근 만난 박 전 대표는 이 일로 자신이 사회적 매장을 당했다고 이야기한다. 1차적인 원인 제공자는 호소문을 배포한 직원들이겠지만, 확대 재생산한 것은 분명 언론이었다.
박 전 대표는 서울시향 사태 이후 이미지가 망가져 직업을 구할 수 없었다. '성추행범', '막말 리더'라는 꼬리표가 그를 늘 쫓아다녔다. 한때 사외이사로 일했던 기업에서 제안이 들어왔다가 "일반 소비자들의 인식이 안 좋다"며 다시 철회됐다.
직장 내 성희롱 예방교육의 사례로도 거론된다. 지인이 "직장에서 성희롱 예방교육 중 강사가 '요즘은 여성 상사의 성희롱도 문제'라며 나를 사례로 들었다는 얘기를 하더라"고 박 전 대표는 전했다. 그 지인이 ‘조사 중이고, 아직 결론도 안 났다’고 문제제기를 하자 넘어갔다고 한다.
식당 예약을 위해 자신의 이름을 말했는데, 전화가 끊기기 전에 점원들이 “그 사람이야, 서울시향 그 사람”이라며 알아채는 대화 내용을 듣고, 택시를 타면 “맞죠?”라며 알아본다는 것이 박 전 대표의 설명이다. 그는 “사회적으로 매장을 당했다. 이건 인격 살인이다”고 호소했다.
성범죄 해결 전문임을 자처하는 모 변호사는 블로그에 박 전 대표 사례를 언급하며 대처 방법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한다. 아마도 키워드를 이용해 블로그에 유입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박 전 대표 사례는 보이지 않았지만, 다른 글들을 보아 그런 식으로 활용하는 게 수법으로 보였다.
언론 칼럼에서도 여전히 그는 막말 리더의 대표 사례로 지목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은 다 가명으로 써도 박 전 대표만큼은 실명으로 쓴다. 그래서 박 전 대표는 “여전히 신문이나 방송을 보지 못한다”고 이야기한다.
◇ 언론, 공격 대상을 바꾸다그런데 언론의 공격 대상이 최근 달라졌다. 너도나도 ‘반전이 일어났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었다’며 이번에는 서울시향 직원들을 내부 공모자라고 공격한다.
시향 직원 10명이 박 전 대표를 5가지 혐의(강제추행, 성희롱, 명예훼손 등)로 경찰(종로경찰서)에 고소했었는데, 경찰이 8월 불기소 의견으로 사건을 검찰에 송치하면서부터 입장이 달라진 것이다.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박현정 전 서울시향 대표의 명예훼손 사건 관련 3월 11일 서울시향과 전산업체를 압수수색했다. (사진=윤성호 기자/노컷뉴스)
여기에 11월에는 서울지방경찰청 사이버수사대가 박 전 대표에게 성추행을 당했다고 주장한 직원 K씨(39)에게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시향직원을 가해자로 모는 분위기는 더욱 심해졌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성추행 피의자 K씨의 진술에 일관성이 없으며, 명확한 목격자가 없다고 했다. 또 도주 및 증거 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구속수사를 요청했다. 다음날 법원이 구속영장을 기각했지만, 언론은 예단하고 보도한다.
아직 서울지방경찰청의 최종 결론이 나오지도 않은 상황인데, 또 똑같은 보도 행태를 반복하는 모양새인 것이다.
최종 결과는 이달 중에 나올 것이라는 얘기가 들리지만 조금이라도 빨리 쓰고 싶은 몇몇 언론은 수사 중인 사건의 진술 내용을 입수해 보도한다. 나중에 또 다른 반전이 나왔을 때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의문이 들 정도이다.
◇ 서울시향은 승자였나?수사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종종 나오는 말이 있다. “범인을 찾기 위해 이 사건으로 이득을 본 자가 누구인지 보라.”
그렇다면 박 전 대표의 반대쪽에 있던 서울시향은 이득을 보았을까. 표면적으로만 살펴보면 바라던대로 박 전 대표는 물러났으니 그렇게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서울시향 역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우선 이미지 타격이 가장 크다. 품위가 브랜드인 예술단체에게 이보다 더한 문제는 없다. 정명훈 예술감독의 거취가 불투명하다는 점 역시 후유증 중 하나이다. 재계약은 한 차례 지연됐다. 현재는 계약 연장 상태로 올해 말 만료된다.
정명훈 서울시향 예술감독. (사진=윤성호 기자/노컷뉴스)
서울시립교향악단 단원 지난 9월 1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서울시향 연습실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정명훈 예술감독에 대한 지지를 밝히고 있다. 박무일 단원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단원들은 현재 상황에서 서울시향을 더욱더 발전시키고 서울시향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최적의 지휘자는 마에스트로 정명훈이라고 믿고 있다” 고 강조했다. (사진=황진환 기자/노컷뉴스)
최흥식 현 서울시향 대표는 정 예술감독과 재계약을 어떻게든 추진하려고 노력하는 모양새지만, 시의회를 비롯해 외부의 시선이 곱지 않다. 정 감독에 대한 고액 연봉 논란 등이 여전히 남아 있어, 재계약 조건을 외부인들이 봐도 납득할 수준으로 만들지 않으면 비난은 여전히 피하기 어렵다.
올해가 10주년이라며, 이를 발판으로 더욱 크게 비상하겠다던 계획 역시 무산됐다. 예산 삭감으로 북미 투어는 취소됐다. 나머지 공연은 예정대로 진행하긴 했지만, 10주년에 걸맞은 칭찬이나 응원은 받지 못했다.
아직 확정되지 않았지만 시 의회에서 예산을 삭감할 거라는 얘기도 들려온다. 이러한 중에 최근 경찰조사 결과로 가해자 구도가 되면서 서울시향의 상황은 더욱 악화될 기미다.
◇ 승자 없는 치킨게임 … 웃는 건 언론이쯤 되면 서울시향 사태에서 승자는 없다. 현재로서는 양측 다 피해자다. 이 사태를 보도하며 득을 본 것은 언론이다. 시청률이 오르고, 조회수가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