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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정책

    돈 마구 찍어내면 안되는 이유

    "특정 영역에 대한 발권력 동원은 사실상의 재정정책"

    (사진=박종민 기자/자료사진)

     

    모든 지폐에는 '한국은행 총재'라는 글자와 함께 직인이 인쇄돼 있다. 화폐를 발행한 기관이 한국은행임을 상징한다.

    지난해 지폐 속 직인의 주인공인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와 오찬간담회 자리에서 농담으로 질문을 건넨 적이 있다.

    요즘 전세 때문에 다들 힘들어 하는데 총재께서 발권력을 이용해 돈을 좀 찍어서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면 좋지 않을까요?

    이 총재의 답변은 간단했다. “국회에 가서 동의만 구해오면 검토해보겠다”였다.

    당시에는 웃고 넘겼지만 최근 발권력을 동원한 국책은행 자본 확충문제가 논란이 되면서 이 대답 속에 함축된 의미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중앙은행이 발권력을 갖고는 있지만 권한을 실제 사용하려면 국민의 동의가 전제돼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행은 돈을 찍을 수 있는 권한, 즉 발권력을 갖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법적 요건만 맞다면 한은 총재를 포함한 7명의 금융통화위원 중 4명만 찬성할 경우 화폐는 얼마든지 찍어낼 수 있다.

    정부재정을 늘리려면 세금을 더 거둬들이거나 빚을 져야 하기 때문에 국민 부담 증가에 따른 조세저항 등의 난관이 많다. 반면 통화는 금통위원들만 동의하면 얼마든지 발행량을 늘릴 수 있다. 이 때문에 돈을 더 많이 찍어서 여유있게 사용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고 국가재정을 집행하는 정부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항상 그런 유혹에 끌리게 된다.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국책은행 자본확충방안도 마찬가지다. 기업 구조조정을 하려면 돈이 필요한데 원칙 대로 재정에서 이 돈을 조달하려면 국회동의라는 골치아픈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에서 부실 책임 문제 등이 도마에 오르게 되고 정부는 곤혹스런 상황을 맞게 된다.

    반면 한은의 발권력을 동원하면 이런 난관을 쉽게 우회할 수 있는데 당사자인 한은은 국민 동의가 필요하다며 곤혹스러워고 하고 있다. 세상 모든 것이 그렇듯 발권력도 쓸 수 있는 돈이 늘어나는 매력이 있지만 그에 따른 부작용도 크기 때문이다.

    ◇ 경제적 영향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행량을 늘리면 기준금리를 내렸을 때와 같은 효과가 나타난다. 실제 한은이 통화정책 수단으로 지금처럼 기준금리를 이용하기 전에는 통화량이 사용됐다.

    발권력을 동원해 화폐의 발행량이 늘어나면 돈의 가치는 그만큼 떨어지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물가상승 압력으로 작용한다.

    지금처럼 저물가가 문제인 상황에서는 화폐의 유동성이 늘어나면서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고, 물가를 끌어올리는 선순환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미국, 일본, EU 등이 시행하고 있는 양적완화는 이런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최근 이른바 '한국판 양적완화'라는 이름으로 부실기업에 대한 구제금융을 발권력으로 지원하는 방안이 제기된 것은 이런 인플레 효과와 관련이 있다.

    물가가 한은의 목표를 크게 밑도는 상황에서 화폐 발행을 늘리면 구조조정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면서 물가상승률도 끌어올리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판단에서다.

    특히 기준금리를 인하할 경우 가계부채 증가 등의 부작용이 발생하지만 국책은행을 이용한 구제금융은 자금이 꼭 필요한 곳에 선별 지원할 수 있어 부작용은 줄이면서 효과는 극대화할 수 있다는 논리다.

    ◇ 부작용

    그러나 발권력을 이용한 국책은행 지원은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국책은행에 대한 자금지원은 사실상 부실기업에 대한 구제금융이다. 전국민에게 부담으로 돌아가는 발권력을 동원해 특정 기업, 특히 대기업에 특혜지원을 하게 된는 셈이다. 구조조정 대상 기업들의 부실을 국민이 떠안게 되는 것이다.

    발권력은 모든 국민에게 부담이 돌아가는 만큼 모든 국민에게 공평하게 적용돼야 한다. 한국은행이 발권력을 가졌다고 해서 특정 집단의 이익을 위해 국가의 부(화폐)를 인위적으로 배분할 권한까지 보유한 것은 아니다. 통화정책은 모든 경제주체에게 공평하고, 중립적으로 적용돼야 한다는 사실은 중앙은행에 있어 하나의 불문률이다.

    따라서 차별적 통화정책이 가능하려면 국민의 대의기관인 국회 동의가 필요하다. 발권력으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금융중개지원대출이 대표적인 예다. 중소기업 육성을 위해 특혜성 지원을 납득할 수 있다는 국민적 공감이 형성돼 있기 때문이다.

    잘못된 경영으로 부실에 이른 기업과 은행에 대해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중앙은행이 돈을 찍어 특혜성 구제금융을 지원하는 것은 통화정책의 원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한은은 국민의 동의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도 있다. 우리나라는 한은이 정하는 기준금리로 통화정책을 수행한다. 기준금리를 낮추면 통화량이 늘어나고, 올리면 줄어든다. 역으로 통화량이 늘어나도 금리는 낮아지고, 감소하면 올라간다.

    따라서 발권력을 사용해 돈을 더 많이 찍게되면 시중의 통화량이 늘어나 금리는 떨어지게 된다. 이를 방치할 경우 기준금리를 통한 통화정책의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한은은 통안증권을 발행해 기준금리 수준이 유지되도록 통화를 흡수해야 한다.

    통안증권을 발행하면 이자는 한은이 부담해야하고 이는 국고 손실로 이어져 결국 국민이 손해를 보게된다.

    이런 문제를 감수하고 실제 발권력을 행사하더라도 당장 우리 경제에 미치는 충격은 미미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번 선례가 만들어지면 앞으로 반복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발권력으로 국책은행 자본을 확충하자는 주장은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구제금융 선례를 근거로 삼고 있다. 국가 경제적 비상사태 때 동원한 수단을 지금의 경제 상황에서 준용하려는 것처럼 이번에 또 하나의 선례가 만들어진다면 구제금융에 발권력을 동원하는 것은 평범한 일상이 될 수 있다.

    일부에서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중립적으로 이뤄지는 통화정책과 달리 특정영역에 자금을 공급하는 발권력은 사실상의 재정정책인 만큼 남용을 막기 위해 국회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RELNEWS: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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