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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낚시가게 아저씨 엉덩이에서 시작됐다"

책/학술

    "모든 것은 낚시가게 아저씨 엉덩이에서 시작됐다"

    소설 '터키어 수강일지'…"나는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나에 대해 말해야 한다"

     



    '터키어 수강일지'는 말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한 열다섯 살 소녀가 소통을 갈망하며 자기만의 표현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화자인 ‘나’는 열다섯 살이 되면서 존나 카와이한 그룹의 멤버가 된다. 존나 카와이한 그룹이란 ‘존나 카와이’라는 표현을 소통 수단으로 쓰는 모임이다. 웃기면 ‘존카ㅋㅋ’, 슬프면 ‘존카ㅜㅜ’, 놀라우면 ‘오 존카’, 아쉬우면 ‘아 존카’, 당황스러우면 ‘존카;;’ 하는 식이다. ‘나’는 이 모음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친구들과 지내기 위해서 그럭저럭 ‘존나 카와이’라는 표현을 쓰며 멤버들과 어울리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나’는 학교 가는 길에 있는 낚시가게 아저씨 엉덩이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고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비밀이 생긴 순간이자 고통의 시작이었다. 생각해보라. “아저씨 엉덩이를 보고 뿅, 갔습니다”라니! 황당하고도 눈앞이 캄캄한 일 아닌가. 설상가상으로 ‘나’는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싶다는 강렬한 소통욕구에 못 이겨 존나 카와이한 그룹의 비인기멤버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에게 비밀을 누설하고 만다. 물론 완전히 털어놓은 것은 아니고 아저씨들에게 매력을 느낀다고 적당히 꾸며서 말한 거였다. ‘나’는 비밀을 들켜 친구들에게 따돌림당할까 봐 두려워하며 친구들과 더 가까워지려고 억지로 노력한다. 그런 ‘나’에게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는 누굴 사랑하거나 무얼 좋아하는 정서는 당연한 거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이해받을 수 없는 정서를 품게 되더라도 억누르지 않고, 참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는 그런 표현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세상에는 ‘존나 카와이’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있고, ‘낚시가게 아저씨 엉덩이’도 그런 거라고. 그리고 스스로의 감정과 정서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표현을 찾아야 한다고. 이때부터 ‘나’는 여러 표현에 관심을 가지고 지난한 탐색을 거듭한다. 그 과정을 한스 요아힘 마르세유가 동행하며 둘은 수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열다섯 인생 최대의 위기를 맞은 소녀가 고민에 빠져 좌충우돌하면서 자신의 표현을 찾아가는 이야기 속에는 ‘표현’과 관련된 각종 에피소드와 예시, 비유가 등장해 읽는 재미를 더한다. 다양한 종류의 예를 들고 인물들의 경험을 들려주는 데서 작가의 유머와 언어 감각, 이야기꾼의 솜씨가 십분 발휘된다. 짧은 예를 하나 들어보자.

    훌륭한 말은, 의도까지도 훌륭하게 해. 그러나 훌륭한 의도가 말까지도 훌륭하게 하지는 않아. 예컨대 네가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가 아무 생각 없이 ‘달이 참 예뻐’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네 말은 아름다운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야. 그런데 네가 달빛에 반사되는 남자친구의 초록색 렌즈를 보고 눈빛의 영롱함에 대해 말해주고 싶어서 ‘네 눈은 도롱뇽과 닮았어’라고 말한다면 그 순간 네 말은 상처와 충격을 불러일으킬 거야. 중요한 것은 의도가 어땠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말을 어떻게 했느냐 하는 거야. (237쪽)

    이러한 풍부한 예시들이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튼튼히 받쳐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터키어 문법정리도 그런 표현의 한 예다.
    ‘나’는 우연히 터키문화원에 들른 것을 계기로 터키어를 수강하게 되고, 혼자서 터키어 문법정리를 하면서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발견한다. 터키어 문법정리를 통해 더 나은 표현법을 찾게 되면 자신의 비밀까지도 말할 수 있게 될지 모른다고. 실제로 한국어에는 없는 터키어만의 문법 요소들은 ‘나’가 생활에서 느끼는 감정이나 인간관계의 여러 측면들을 적절히 설명해준다. 이는 터키어에 대한 작가의 깊은 이해가 매우 각별한 방식으로 작품 속에 녹아들어 이루어낸 결과다.

    우리가 자기만의 표현, 가장 알맞은 좋은 표현을 찾는 이유는 소통을 잘하기 위해서다. 오랜 옛날, 전 세계인이 모두 같은 표현을 사용하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하늘 끝까지 닿는 바벨탑을 세우려 했던 오만함 때문에 신의 노여움을 사게 돼서 여러 갈래의 표현으로 나뉘어버렸다. 어쩌면 신의 저주는 지구상 60억 인구가 적어도 60억 표현을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고, 각자에게는 자기 자신의 표현이 있다. 그렇다면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가? 이 소설은 어쩌면 이 질문에 대한 긴 대답일지도 모른다.
    작가는 등장인물의 말을 빌려 대답한다. 서로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대화하기 위해서는 서로 잘 살펴야 하고,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절실히 노력해야 한다고. 그리고 나를 이해시키고 이해받기 위해서는 내가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 우리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말하는 방법을 찾아 저마다 끝없이 탐구해야 한다.

    나는 말하는 방법을 조금 알았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기 위해서도 말해야만 한다는 사실도 알았다.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나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아주 의미 없어 보이는 이야기라도. (276쪽)

    저자 우마루내는 199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에 재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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