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공(獨功)이란 소리꾼이 스승에게 배운 소리를 가다듬고, 더 나아가 자신만의 독창적인 소리를 만들어내기 위해 깊은 산속에서 홀로 공부하는 것을 말한다. 한마디로 백척간두에 홀로 서서 절절하게 공부하여 진정한 자기 소리를 찾는 과정이다. 이것은 단순히 판소리에만 해당되는 일이 아니다. 분야를 막론하고 예술가를 꿈꾸는 모든 사람들이 거쳐야 할 과정이다. 스승의 그늘에서 벗어나 누구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묻고 찾아서 절차탁마하는 진짜 공부를 거쳐야 독창적인 예술 경지에 오를 수 있다. 그렇기에 예술가란 눈앞에 놓인 세상일에 대한 근심은 과감히 접어두고 자신의 영혼이 담긴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궁벽진 곳으로 가서 스스로 싸워야 한다.
'독공'의 저자 배일동은 26년간 소리꾼으로 수많은 국내외 공연을 해왔으며, 7년간 산속에서 홀로 독공을 했다. 산속에 초막을 짓고 폭포 옆 바위에 의석대(倚石臺)라는 이름을 붙여놓고, 소리하다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바위에 기대어 묻고 또 물었다. 의심을 품으면 그것이 해결될 때까지 물고 늘어졌다. 그렇게 수년간 공부한 끝에 우리 선조들이 엄청난 우주적인 질서를 판소리의 율려(律呂)에 담아놓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단도 호흡도 발성도 모두 우주의 질서에 따라 율려를 배정한 것이었다. 그는 이 경험을 바탕으로 세상으로 나와 동료 음악인들과 함께 판소리에 담긴 우리 민족의 예술정신의 뿌리를 탐구해왔다. 그는 판소리가 불과 300년 정도의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는 수천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우리나라 고유의 예술 철학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이 깨달은 판소리의 예술성의 뿌리를 밝혀낼 뿐만 아니라, 한 분야의 대가에 오르기 위해 거쳐야 할 독한 공부 과정을 진솔하게 털어놓고 있다. 더불어 판소리계를 비롯한 우리나라 전통 예술계에 대한 냉철한 분석과 충고를 하고 있으며,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전통 예술에 몸담고 있는 예술가가 직접 쓴 책이 턱없이 부족한 현실에서 또렷이 빛나는 결과물이다. 이 책을 통해 기성 예술가들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점검해보게 될 것이며, 예술가를 꿈꾸는 학생들은 진정한 공부 방법을 깨닫게 될 것이며, 독자들은 예술가의 심연을 들여다보는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배일동은 예술은 재주로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성숙한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재주와 정신 수양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재주만 있고 덕이 없어서는 안 되고, 반대로 덕은 빛나지만 재주가 변변치 않아도 안 된다는 것이다. 재덕(才德)이 함께 빛나야 비로소 충실미(充實美)가 넘쳐나게 된다. 그러므로 오랜 시간 동안 예술 체험을 착실히 쌓아가고 범인문학적 교육을 받아야만 자기만의 탄탄한 예술 세계에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재덕이 겸비되어야 비로소 대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는 것이다.
배일동은 예술을 공부하는 자가 살아가는 최상의 방법은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말한다. 궁색한 살림을 살면서도 그것에 구속되지 않고 평안하게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내적 세계가 확 열려 득음의 경지에 오르게 된다.
책 속으로전통 예술의 가장 이상적인 계승 방법은 선배들의 뛰어난 예술 정신을 성실히 배우고 통찰하여, 시대의 풍조와도 잘 어울리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요즘 우리 국악계는 이런 노력들이 깨지는 모양새이다. 언제부턴가 정작 중요한 내 것은 어설프게 익힌 상태에서 남의 것을 가져다가 억지 춘향 식으로 붙여 음악을 만들어가는 풍조가 유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악의 대중화라는 뜻을 세우고 과감한 창작곡들을 선보였지만, 과연 대중들의 호응 속에 오래 남을 곡들이 얼마나 있을까? 잠시 국악 연주가들 사이에 연주되다가 알게 모르게 슬며시 사라져버린 곡들이 부지기수이다. 어설프게 흉내 내는 예술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다. 그래서 창작은 아무나 흉내 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명장들이 만든 훌륭한 창작곡들은 세상을 풍요롭게 해준다. 하지만 요즘은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 창작의 대열에 끼어들어 깊이 없는 곡들이 난무하고 있다.
-제7부 전통의 법제 속에서 새로운 보옥을 캐다
도를 막 찾아 나서는 초심자들은 늘 궁고함 속에 있어야 공부가 충실해지지만, 공부가 원만해지고 경험이 풍부해진 후에는 그런 경계를 초월해야 한다. 그래서 추사 선생도 빈궁(貧窮)과 부궁(富窮)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배울 때는 빈궁해야 하고, 깨쳐서 터득했을 때에도 부궁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이다. 궁에는 물질의 궁과 정신의 궁이 있다. 빈궁은 가난하면서 궁한 것이고 부궁은 부유하면서도 궁함이다. 초심자가 도를 배울 때는 정신이 약하고 궁하기 때문에 물질의 풍요를 늘 멀리해야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된다. 만약 물질의 풍요에 얽매여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보면, 공부 환경은 엉망진창이 되기 때문에 빈궁을 말한 것이다. 이것이 기한(飢寒)의 발도심(發道心)이다.
-제8부 곤궁함을 스승으로 삼아 예술을 완성하다
판소리는 우주의 음양, 동정, 시공 등의 흐름 속에 생생한 변화를 포착하여 성음으로 표현한다. 한 번 지나간 시간이 두 번 다시 오지 않듯, 한 번 내뱉은 소리도 허공에 흩어져 주워 담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음악을 천지와 더불어 조화롭다고 한 것이다. 판소리뿐만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음악이 그렇다. 이렇게 쉼 없이 흘러가는 만물의 정경과 천변만화를 읽어낼 때, 우린 비로소 소리의 뜻을 얻었다고 말할 수 있다. 득의해야 득음할 수 있다. 그러나 득의는 생각만으로는 절대 얻을 수가 없다. 격물을 치열하게 해야 치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소리를 열심히 하면서 음악적 이치를 강구하고, 그 속에서 새로운 법도와 격식이 생겨 마침내 자신만의 독특한 경지를 이루어 득의하니, 성음이 저절로 이루어져 득음에 이르게 된다. 말장난 같지만 이 말을 곱씹어보면 반드시 그 속에 묘미가 들어 있다.
-제9부 마침내 소리꾼의 최고 경지에 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