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 '그런 일'은 안도현이 지난 14년에 걸쳐 써온 산문들을 모은 것이다. 하지만 이 글들이 아우르는 시간대는 그보다 훨씬 넓다. 시인의 성장기부터 오늘에 이르는 50여 년의 세월이 배경으로 펼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책을 읽는 동안 독자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한 시인의 생애를 꽤 소상히 접하게 된다. 경북 예천에서 출발하여 안동, 대구, 경기도 여주, 전라도 전주로 이어지는 지리적 이동의 이력서와 문학소년에서 전교조 해직교사로, 전업 문인으로, 대학에서 시를 가르치는 교수로 옮겨온 신분적 변천의 이야기들은 서로 맞물리면서 안도현 문학을 만들고 키운 요소가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더불어 예민한 영혼이 살아내기에 결코 만만치 않았던 한국 사회의 지난 흐름을 구체적인 실감 속에 대면시켜준다.
시인의 산문인 만큼 '그런 일'에서 시와 문학에 대한 생각을 담은 글들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손아귀에 확실히 쥐어지는 돈과 권력만이 숭배 받는 현실에서 시와 문학은 손에 잡히지 않는 ‘헛것’을 쫓는, 한편으로 허망하기 짝이 없는 작업이다. 그러나 시와 문학은 “삶을 돌아보게 하거나 지친 이에게는 이 세상이 살아볼 만한 곳임을 가르쳐”(54)줌으로써 세계와 사람들 속에 피가 돌게 하는, 없어서는 안 될 삶의 양식(樣式+糧食)이다. 그 점에서 '그런 일'의 시인이 “헛것에 대한 투자”(52), 곧 시 쓰기와 시 읽기를 독자들에게 되풀이하여 권유하는 것은 시인이자 문학교수로서의 직업적 소명이 시키는 독촉이 아니라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거를 수 없는 영혼의 식사에 초대하는 일에 가까워 보인다.
누군가를 식사에 초청하는 사람이 허투루 만든 음식을 내놓지 못하듯 시인은 독자의 밥상에 올릴 시의 품질, 그 좋고 나쁨에 까다롭게 신경을 쓸 수밖에 없다. 그에게 좋은 시란 “시간을 녹여서 쓴 흔적”이 있고 “말 하나에 목숨을” 거는 시이며 “가슴과 손끝으로 하는 연애”(51) 같은 시, 다시 말해 독자에게 전인격적으로 호소하는 시다. 그리하여 “사람을 변화시키고 사람 사는 세상에 긍정적인 충격을 주는 문학”(287)이 그가 꿈꾸는 문학이다. '그런 일'의 한 부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자작시들에 대한 해설과 ‘시작 노트’들은 그와 같은 문학적 기준을 충족하는 시를 생산하기 위해 이 시인이 기울여온 노력의 현장일지라고 할 수 있다. 이 글들은 안도현의 등단작 「서울로 가는 전봉준」과 널리 알려진 「너에게 묻는다」를 비롯한 작품들이 어떤 자리에서 어떤 심경으로 씌어졌는지를 생생하게 전해준다. 아울러 여기에는 각각의 시편들이 전문 인용됨으로써 독자에게 한 권의 조촐한 시집을 읽는 즐거움을 덤으로 안겨주고 있기도 하다.
'그런 일'에는 직접 시를 이야기하지는 않는 글들이 많지만 이 글들 역시 시를 대하는 마음으로 대상을 마주한 글들이다. 이를테면 이기주의와 획일성이 득세하는 가운데 “앵무새의 혀로 말하는 방식”(271)만 주입하며 창의성을 죽이는 우리 사회의 풍토와 습속에 맞서 ‘엉뚱함’을 옹호하고, 직설적이고 날 선 말들이 저 자신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현실에 탄식하면서 “은유적 대화를 회복하라”(263)고 권할 때 저자는 세상이 시를 모방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는 셈이다. 엉뚱함은 다름 아닌 시의 발상지이며, 서로 다른 것 속에서 비슷함을 찾아내는(그리고 그 역도 성립하는) 방법인 은유는 너와 내가 서로 다름에도 서로 같은 삶의 위도에서 목숨을 나누고 있음을 알게 하는 시의 특기이자 비장의 연모이기 때문이다. 특히 은유란 너와 내가 다르다는 이유로 너를 밀어내지 않고 곁에 두는 부드러운 마음의 기술과 같은 것이다(“은유는 부드러움의 편”[262]). '그런 일'을 떠받치는 기반도 바로 그 부드러운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실린 글들이 어떤 대상을 비판적으로 다룰 때조차 고발장이나 격문보다 편지와 닮아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실제로 아들딸이나 휴전선 북쪽의 ‘김은숙 씨’와 계관시인 등을 수신자로 둔 편지들이 여럿 있기도 하지만, 권정생을 비롯한 저자들의 책에 보탠 발문이나 해설, 서평 형식의 글들도 남의 잘잘못을 시시콜콜히 따지고들기보다 부드러운 마음을 담아 타인의 안부를 묻고 제 할 말을 전하는 편지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부드러운 마음이 서식하기에 우리 현실은 얼마나 모진 곳인가. 예컨대 안도현의 북한 방문기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읽을거리이면서 (헐벗은 북녘 산야에 사과나무를 심으려 동분서주하던 저자의 발걸음이 어느 시점에서 문득 중단되어 있는 사실이 일러주듯) 한반도 거주민들의 운명을 가둔 성채가 얼마나 진저리나도록 견고한가에 대한 보고다. 또 재판정에서 ‘발표’된 까닭에 이 책에 낯선 틈입자처럼 끼어 있는 「최후진술서」는 그 성채를 세우고 지켜온 이들이 자신들의 규칙을 따르지 않는 자에게 어김없이 안겨주는 보복의 물증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그로 하여금 사람이든 세상을 상대로 하든 “빈번히 빗나가는 사랑하는 일”(178)을 중지하거나 맥 빠지게 할 근거가 되고 있다는 증거는 없다. 시인은 도끼에 갈라지는 순간 향기를 내는 전단향나무에 관한 고대 인도의 잠언시 「수바시따」의 비유를 옮겨 적어놓고 있다. 이것은 잠시의 휴지기 속에서 이 시인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다짐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에 좌절하고 패퇴당하면서도 세상에 저주나 악담이 아닌 향기를 전함으로써 그 세상이 우월하다고 뻐길 근거를 앗아버리는 일이란 시와 시인의 일과 전혀 다르지 않을 터이니.
책 속으로 나는 일필휘지의 필법을 익히지 못했으나 후회하지 않는다. 자책할 이유도 없다. 한 줄 한 줄이 전전긍긍이었으므로 이 산문들을 그 흔적들이라고 해두자. 하지만 그런 시간이 없었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나를, 지금, 이곳에, 나로 있게 해준 말들 앞에 옷깃을 여민다.
-머리말(4쪽)
문학에 눈을 뜨면서 해마다 12월 언저리에는 이른바 신춘문예 열병을 앓곤 했는데, 당선 통지를 기다리며 연탄불에 라면을 끓이는 날이 많았다. 라면이 끓는 양은냄비를 숟가락으로 익숙하게 들어 올리는 일은 이력이 붙었으나, 기다리는 신문사의 당선 통보는 왜 그리 목을 길게 만들던지. 그런 겨울, 연탄도 떨어지고 친구네 집에 두어 장 빌리러 가기도 민망해서 차가운 자취방에서 이홉들이 소주를 병째 들이켜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들던 날이 있었다. 내 문학은 연탄의 뜨거운 기운을 받을 자격조차 없다고 자책하면서 말이다.
-1부 글을 쓰는 일(16쪽)
밤새워 화투판에서 밑천 다 날리고 새벽 마루 끝에 앉아 냉수 한 사발 들이키는 사람처럼, 다 벗어던지고 몸뚱이 하나 남은 겨울 나무처럼 스스로 벌거벗기 위해 서 있는 것들이 있으니, 오로지 뼈만 남아 몸 하나가 밑천인 것들이 있으니, 올해 당신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모든 것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해도, 희망 같은 것을 몽땅 잃어버렸다고 해도, 우리가 가진 절망이 많으니, 절망을 재산으로 삼고, 절망으로 밥을 해먹고, 절망으로 국을 끓일 각오로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살아온 날들에 대해서는 흔쾌히 반성문을 쓰고, 살아갈 날들을 위해서는 빛나는 예지의 선언문을 쓰고, 누가 뭐라 해도 후진하는 법 없이, 요란하게 수다를 떠는 법 없이, 발소리를 남기지 않고 침묵으로 한 생을 밀고 가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2부 마음을 보내는 일(127쪽)
이 사건과 관련해서 두 가지만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저는 트위터에 올린 17개의 글에서 “박근혜 후보가 안중근 유묵을 훔쳐 소장하고 있거나 유묵 도난에 관여했다”는 취지의 표현을 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검찰은 제 글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소설을 썼습니다. 검찰은 정치적 판단에 의해 무리하게 저를 기소했습니다. 권력에 대한 과도한 충성심이 오히려 그 권력에 해를 끼치게 된다는 것을 우매한 겸찰은 모르고 있습니다.
-2부 마음을 보내는 일(137쪽)
시작 노트 37_그날은 절대로 쉽게 오지 않는다. 그날은 깨지고 박살나 온몸이 너덜너덜해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참고 기다리면서 엉덩이가 짓물러진 다음에 온다. 그날은 그날을 고대하는 마음과 마음들이 뒤섞이고 걸러지고 나눠지고 침전되고 정리된 이후에 온다.
-3부 시를 읽는 일(143쪽)
시 창작 시간에 나는 사랑에 대해서 쓰려면 ‘사랑’이라는 말을 시에다 쓰지 말아야 한다고, 그 말을 아예 잊어버려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주문한다. 시로 들어가는 첫 번째 관문은 은유다. 잘 알다시피 은유는 차이성 속의 유사성을 끄집어내는 비유의 방식이다. 대상의 차이를 인정하면서 참신한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수사인 것이다. 그리고 은유는 직설적인 언어의 뻔뻔함과 뻣뻣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기여한다. 어떤 의미를 전달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기는 하지만 은유가 앞장서서 갈등을 조장하지는 않는다. 은유는 부드러움의 편이다.
-4부 세상을 들여다보는 일(262쪽)
시인으로서 최근의 저는 낙제자입니다. 시에 투여해야 하는 절대적인 시간을 다른 데로 유용하고 있습니다. 백 잔의 술을 마시고도 한 줄의 시를 완성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안달복달해도 오지 않는 시를 낚아채려고 눈을 부릅뜨기보다는 멀리 지나가는 기차 소리처럼 가만 놔두는 일이 잦습니다. 시가 기관차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던 때를, 시가 삶을 달구고 삶이 시를 달구던 때를 ‘그때’라고 한 오라기 뉘우침도 없이 회고할 뿐입니다. 시도 쓰지 않으면서 머리꼭지에 턱하니 시인이라는 벼슬을 수탉처럼 붙이고 다닙니다. 저는 망하기 직전입니다.
-5부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