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너희도 신처럼 되리라'에서 구약성경 속 모세사 예언자적 사명 때문에 지게 된 고난을 언급하면서 "예언자가 되고 싶어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다"고 썼다. 하지만 재미있게도 프롬 자신은 20세기의 세계가 직면한 고난 속에서 인간의 내면과 세계의 문제를 고찰하면서 끊임없이 평화 치유의 길을 설파하는 예언자가 되었다.
그는 여러 사상가의 사유를 활용해 소비문화, 기업자본주의, 군국주의, 권위주의에 뼈아픈 비판을 가하며 사랑의 삶, 생명 사랑과 같은 생명애의 가치를 거듭 설파했다.
에리히 프롬은 사회참여 지식인으로서 국제적 강연을 주관하기도 하고 초청받기도 했으며 세계 고위층 인사들에게 조언했던 명사이면서도, 당대의 주요 논쟁에서 학문적 깊이를 지적당하며 갈수록 학계의 냉대를 받은 고독한 인물이기도 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에리히 프롬이라는 인물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는 그저 성공한 이상주의자, 지나간 시대의 명망가일 뿐이었얼까?
신간 '에리히 프롬 평전'은 모든 서신과 말년의 인터뷰 녹취, 주변인들의 기록과 구술을 놀랍도록 철저히 채록해 구성했다. 이 전기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에리히 프롬이라는 인간의 삶과 존재 자체를 흥미롭게, 풍부하게 그려낸다.
저자 로런스 프리드먼은 프롬이 "가정환경을 딛고 일어서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과 우리의 생활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기 위해 다양한 '삶들'을 고안해냈던, 스스로는 빈틈이 적지 않은 한 인간"이었다고 말한다. 프롬은 때론 경솔하고 변덕스럽게 비치더라도, 결코 환경이 지신을 고착화하도록 내벼려두지 않았으며 종국에는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일상을 축조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에리히 프롬은 1900년 3월 독일 프랑크푸트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의 프롬의 삶은, 그가 인생 후반기에 한 인터뷰에서 밝혔듯이 "근심 많은 아버지와 자주 우울해하는 어머니 사이의 외아들"로 압축될 수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프롬에게 의존했고, 어린 그에게 가족으로부터 뛰쳐나가고 싶다는 충동을 심어주었다.
프롬은 어린 시절부터 가정에서 깊은 소외감을 경험했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가 학자로서 '사회적 개념'에 촛점을 맞추게 되는 데 일조했다. 유년기에 느낀 이런 소외의 감정들은 스스로 행복한 삶을 적극적으로 구축해나가도록 그를 추동했다. 프롬은 우울, 소외, 활기로 이루어진 '감정의 삼각형' 속에서 학자로서, 활동가로서, 대중 저술가로서 수많은 활동을 개척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