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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희경, '술,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음악'을 이야기하다

책/학술

    은희경, '술,옷, 신발, 가방, 책과 사진,음악'을 이야기하다

    신간 소설집 '중국식 룰렛'

     

    은희경의 소설집 '중국식 룰렛' 이 나왔다. 이 소설집에 실린 여섯 작품은 술, 옷, 수첩, 신발, 가방, 사진, 책, 음악 등 우리가 늘 가까이하고 삶에서 놓을 수 없는 사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모티프들은 곁에 사람은 없고 사물만 있는 “예상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살아가는”(「불연속선」 137면) 사람들이 위안을 느끼는 유일한 온기의 ‘대용품’들인지도 모른다. 소설 속 인물들은 대개 표정을 감추고 ‘거짓된 진실게임’을 하면서(「중국식 룰렛」) 상대에게 속마음을 보이지 않거나 “현실을 수긍하고 거기에 맞춰 자신의 입장과 한계를 정하는”(「별의 동굴」 143면) 고립되고 단조로운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들 주변의 사물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한 개인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 대부분의 실상을 그대로 담아낸 것이다.

    그 수첩을 읽게 된 게 단순한 우연일까. 나에게 보내는 인생의 암시 같은 건 아닐까. 운명이란 비정하고 무자비하지만 늘 전령을 먼저 보내 경고를 할 만큼은 용의주도하다고 어릴 때부터 나는 종종 생각해왔다. 그 메시지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계속 방심하는 사람에게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집행해버린다.(「장미의 왕자」 58면)

    물건만은 자주 바꾸는 편이었다. 쉽게 버리고 금방 다른 걸 새로 샀다. 새것을 좋아한다기보다 오래 곁에 두고 아끼는 물건이 없다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사람을 대하는 태도도 비슷했다. 조직에 잘 적응하고 동료들과도 사이가 좋았지만 특별히 친하거나 오래 만나는 사람은 없었다. 매뉴얼대로 사는 사람이 갖기 마련인 정돈됨 때문에 어딘가 규격품 같은 느낌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 규칙성과 건조함에 싱거운 유머감각이 보태지면 유능하고 담백한 성격으로 비쳤고 그 결과 곧잘 여자들의 호감을 사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자친구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했다.(「대용품」 93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영화에서 제목을 따온 표제작 「중국식 룰렛」은 “악의를 감추기 위해 우연을 가장하고 모습을 드러내는”(28면) 공교로운 운명을 다룬다. ‘중국식 룰렛’은 일종의 진실게임으로, K의 술집에 모인 네명의 남자들은 라벨이 감춰진 위스키를 마시며 진실보다는 거짓에 기대는 게임을 한다. “소설 곳곳에 스민 위스키향”(황정아 해설)은 우리를 뜻밖의 운명으로 매혹하고, 그들은 저마다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며 절반의 거짓과 절반의 진실이 뒤섞인 정직한 거짓말들을 쏟아낸다. 진실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던지는 은희경의 질문들은 채워지지 않는 진실로 향하게 하는 열쇳말인지도 모른다.

    당신의 가장 큰 실수는 무엇입니까. 당신이 평생 후회할 만한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질문과 대답들이 오고 갔다. 실수와 후회. 분명 그럴 만한 일들이 있었다. 그 댓가로 나는 K의 술집에서 가장 형편없는 술을 선택할 각오로 이곳에 왔다. 그의 게임에 말려들어 아내일지도 모르는 여자의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분명 망상일 것이다. 사실은 그냥 라가불린을 좋아하는 어떤 여자의 이야기이다. 상관없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컬렉션이 우리의 가장 좋은 시절을 담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행운을 가득 채운 차가운 술병들이. 그것들이 있는 한 천사에게 2퍼센트를 돌려달라고 억울해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술잔을 내려다보며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자신이 운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까.(「중국식 룰렛」 52면)

    삶은 작은 우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익숙하지만 낯선 깨달음을 '중국식 룰렛'은 일깨워준다. 헛헛하고 단조로운 삶도 “텅 빈 완성”(61면)에 이를 수 있음을, 오래 울었던 얼굴을 누군가가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결코 허황하지 않음을 은희경은 가벼워진 마음과 따뜻한 목소리로 말해준다. 답답한 현실에서 크고 작은 위기와 시험에 빠질 때에 우리는 은희경이 만들어놓은 “작고 하얀 빛의 웅덩이”에 마음 편히 빠져도 좋다. 그러면 “다정한 부력”(작가의 말, 211면)으로 그녀가 우리의 온몸을 감싸안아줄 것이다. 일상을 존중하게 하는 은희경의 소설이 우리의 삶을 어떤 ‘뜻밖의 운명’으로 향하게 해줄지 자못 기대가 된다.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되는 도착점”, 그것은 분명 “더 좋아진다는 뜻”(「정화된 밤」 197면)일 것이다.

    괜스레 긴 머리를 잘라버리고 입지 않을 운동복을 사고 지독한 몸살을 앓고 오전이 다 가기도 전에 세끼를 먹어치우고 한밤에 불쑥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한시간씩 골목을 쏘다니고. 그러고도 다음 날이면 약속된 시간에 배달된 우유처럼 내 마음이 당신의 문 앞에서 다소곳이 아침을 기다리고 있던 날들이, 대체 몇번이었는지. 나는 그 마음을 당신이 조금이나마 알아주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절대로 알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라고 하는 함박눈이 미친 듯이 내려서 귀퉁이에 홀로 쌓여 있다가 흔적도 없이 녹아버린 봄이 되어서야 당신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났으면 한다.(「장미의 왕자」 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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